[friday] 차가운 국수 한 젓가락 후루룩… 여름의 맛, 여름의 소리였다

조선일보
  • 정동현 음식 칼럼니스트
    입력 2018.08.10 03:00

    [인생식탁] [정동현의 음식이 있는 풍경]
    서울 연희동 '청송함흥냉면', 용인 고기동 '고기리장원막국수'

    서울 연희동 ‘청송함흥냉면’의 바다 내음 풍겨나는 회냉면. 거칠고 야성적이다.
    서울 연희동 ‘청송함흥냉면’의 바다 내음 풍겨나는 회냉면. 거칠고 야성적이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겨울에는 영하 20도, 여름에는 영상 40도 찍는 서울이다. 덕분에 서울에서 냉면을 먹는 일은 더 이상 개개인의 기호 문제가 아니다. 일종의 생존 방식에 가깝다. 이래서 조상들이 세계를 통틀어 유일무이한 차가운 국수, 냉면을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작년 여름까지는 삼계탕 같은 다른 보신음식과 라이벌 관계였다. 하지만 올해는 '닥치고 냉면'이다. 그중 역시 주인공은 뼈대 굵은 평양냉면이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로는 젊은 세대로까지 유행이 번졌다. 이제 국수 한 그릇에 취향과 역사, 문화, 정치까지 담아 풍월을 읊는다. 그 모습을 보면 슬슬 심사가 뒤틀리고 아니꼽다. 평양냉면이 아니더라도 괜찮은 '차가운 국수'가 널렸기 때문이다.

    먼저 따져야 할 '차가운 국수'는 평양냉면의 영원한 라이벌 함흥냉면이다. 장안에 손꼽을 집이 여럿이지만 그중에서도 연희동 '청송함흥냉면'을 빼먹을 수는 없다. 이 집은 오장동을 벗어나 먹을 만한 함흥냉면을 파는 몇 안 되는 냉면집이다. 하루걸러 한 집이 문을 닫고 여는 빠르고 빠른 연희동의 터줏대감이며, 젊은이들이 '신상' 맛집을 찾아 떠도는 연희동 거리에서 유난히 노인 손님 비중이 높은 곳이기도 하다.

    부채를 연신 흔드는 노인들 틈에 자리를 잡고 앉아 뜨거운 육수부터 마셨다. 육수를 두 컵째 마시고 나니 지금껏 흘린 땀을 보충한 듯싶었다. 사골을 우려 담백하고 소금기가 적어 몇 컵이고 마실 수 있었다. 그러나 육수를 마실 틈이 없었다. 냉면이 나오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주방에서 면을 헹구고 짜고 꼬는 면잡이의 어깨가 레슬링 선수처럼 부풀어 올랐다. 발레파킹 운전기사가 차를 주차하듯 날랜 몸놀림으로 냉면 한 그릇이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빨갛게 무친 간재미 무침을 보니 무의식중에 침샘이 작동했다. 젓가락에 힘을 주고 창백하게 빛나는 면발, 그 아래 자작이 깔린 육수와 간재미 무침을 고루 섞었다.

    평양냉면은 도도하게 툭툭 끊어 먹는다지만 함흥냉면은 고기를 뜯듯 면을 찢어 먹어야 제맛이다. 이 집의 면발은 갓 잡은 회를 씹듯 차지게 이에 엉기고 감겼다. 고집스럽게 가위를 쓰지 않은 보람이 있었다. 면 사이사이로 시큰하게 코를 치고 매콤하게 혀를 울리는 간재미 회가 씹혔다. 혀로 면을 말고 이가 면을 뜯었으며 목구멍으로 그 면을 삼켰다. 내 몸이 그 면에 꿰어진 것 같았다. 아랫배 언저리까지 매운맛이 돌 무렵 스테인리스 그릇이 바닥을 드러냈다. 그제야 그릇에 바싹 숙인 고개를 들었다. 혀에 붙은 간재미 맛이 긴 여운을 남겼다. 그 여운 사이로 해풍을 맞으며 욕을 걸하게 내뱉고 크게 웃는 사내와 아낙들이 보였다.

    이 냉면 듀오를 벗어나면 전통과 격식을 따지지 않고 무심한 듯 휘휘 말아먹는 막국수가 있다. 막국수는 춘천을 필두로 김 가루와 설탕, 참기름을 듬뿍 쳐서 고소하고 달달한 맛을 원동력 삼아 뚝딱 해치우는 음식이었다. 영동 고속도로를 타고 강원도 어디쯤에 가서 너른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온 가족을 이끌고 먹는 관광지 음식이었다. 하지만 무엇이든 어떻게든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은 있다. 분당 너머 용인 '고기리장원막국수'는 막국수라는 음식이 가진 맛을 어떻게 다듬고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범(典範)과도 같다. 이 집 인기는 계절을 가리지 않지만 여름이 되면 아이돌 가수에 맞먹는다. 굽이진 고기동 산길 끝자락인지라 퇴로는 없다. 하지만 그 기다림은 언젠가는 보상받기 마련이다. 어깨를 부딪히며 정신없는 아사리판이 아닌 너른 정원과 계곡이 보이는 자리에 앉으니 숨이 탁 놓였다.

    쫀득한 비계가 살아 있는 수육 한 접시를 새우젓에 찍고 시큰한 배추김치를 곁들였다. 옛 어른이 사랑방에서 오후 나절을 보내는 듯 기분이 느긋해졌다. 점원이 총총걸음으로 막국수를 놓고 갔다. 우선 비빔막국수는 이 집의 기본이다. 면 한 가닥도 풀어지지 않게 단정히 올라앉은 면 똬리에 이 집의 기상이 엿보였다. 면을 양념에 비벼 먹으니 수채물감으로 칠한 듯 은근하고 얌전히 매콤한 맛이 퍼졌다.

    용인 고기동 ‘고기리장원막국수’의 물막국수에선 시조를 읊듯 맑고 정한 기운이 뻗친다.
    용인 고기동 ‘고기리장원막국수’의 물막국수에선 시조를 읊듯 맑고 정한 기운이 뻗친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물막국수는 평양냉면과 별반 다르지 않은 본새와 맛을 품었다. 쉽게 티 내지 않는 육향과 그윽한 동치미 국물 맛을 보니 하얀 도포와 갓이라도 써야 할 것 같았다. 마지막 그릇은 들기름 막국수였다. 참기름과 다른 풋내를 밴 들기름에 고소한 김 가루를 뿌리고 담백하고 덤덤한 메밀면을 말았다. 큼큼하고 구수하고 정다운 맛이 서늘한 면을 타고 재잘거리듯 통통거렸다. 후루룩 한 젓가락. 후루룩 두 젓가락. 너른 마당에서 아이들이 지치지도 않고 뛰어다녔다. 까르륵 거리며 웃었다. 매미가 길고 높은음을 땄다. 여름의 소리였다. 여름의 맛이었다.

    청송함흥냉면의 손왕만두.
    청송함흥냉면의 손왕만두.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고기리장원막국수의 들기름 막국수.
    고기리장원막국수의 들기름 막국수.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청송함흥냉면: 회냉면(1만원), 비빔냉면(9000원), 손왕만두(8000원).

    고기리장원막국수: 비빔막국수(7000원), 물막국수(7000원), 들기름 막국수(7000원), 수육(소, 1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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