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장구·북소리가 이국땅에 스며들고 우러났다, 된장찌개처럼…

조선일보
  • 박상현 캐나다 부처트 가든 정원사·수필가
    입력 2018.08.10 03:00

    [박상현의 안단테로 살아보니] 캐나다서 만난 국악 연주자

    지난달 캐나다 부처트 가든 야외무대에서 국악 크로스오버 그룹 ‘노름마치’가 공연을 하고 있는 모습. 낯설어하던 캐나다 관객도 이내 흥겨워했다. / 박상현
    "한국에서 온 노름마치입니다."

    사회자가 무대에 선 이들을 소개하자 객석에선 가벼운 박수소리가 흘러나왔다. 감정이 실리지 않아 건조했고, 벌새가 날아와 꽃에 머무는 시간처럼 짧았다. 개량한복을 입은 다섯 연주자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고 금발의 관객들 역시 속내를 알 수 없는 덤덤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잔디밭에 꾸며진 널따란 야외무대.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의 풍경이라기에는 뭔가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분위기다. 준비하는 이들과 기다리는 이들을 연결해주는 '익숙함'이라는 끈이 존재하지 않는 탓인 것 같았다. 고개 숙여 인사를 한 연주자들이 장구와 징, 북을 앞에 두고 자리에 앉았다. 그들의 얼굴 위에 불그스레한 노을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깽 깨갱 깽 깨갱 깽 깨갱 깽깽."

    무대 한가운데서 선 상쇠의 꽹과리 소리가 날카롭게 터져 나왔다. 쇠가 만들어낸 소리라서 그런지 가늘게 퍼지면서도 좌중을 압도할 정도로 단단했다. 내가 캐나다 이곳 부처트 가든에서 일을 시작한 이후 10여 년 만에, 지난달 첫 한국 뮤지션들이 공연을 시작한 순간이었다.

    다섯 주자(奏者)들의 신명나는 연주는 한 시간 남짓 계속됐다. 묵직한 북과 날카로운 꽹과리 소리가 무대를 가득 채우는가 싶더니, 처연한 단소 연주로 어둑해져 가는 정원의 여름 하늘을 애잔하게 수놓았다. 태평소의 경쾌하고 풍성한 소리, 나발의 근엄한 음색, 그리고 소라 껍데기로 만든 나각의 묵직한 울림도 더해졌다. 치렁치렁한 상모가 돌아가고 흥부 내외가 박을 타는 소리가 자진모리장단으로 퍼져 나갔다.

    이날 공연의 백미는 장구 세 개가 어울려 만들어낸 합주였다. 단지 이국땅에서 듣는 전통악기 소리라서가 아니었다. 궁편과 채편에서 울려 나오는 음의 고저가 정박과 변박을 넘나드는 신묘한 장단과 어울려 소름이 돋았다. 궁채와 열채가 만들어내는 투박함과 세련미의 오묘한 조화 역시 도저히 하나의 악기로 만들어낸 소리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연주는 세상 어느 나라, 어느 민족 앞에 내 놓아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창의적이고 빼어났다. 게다가 셋이 어울려 이뤄낸 합(合)은 그들이 흘린 땀을 증명하고도 남았다.

    아니나 다를까. 관중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금발의 중년 여성이 일어서서 손뼉으로 박자를 맞추기도 하고 나이 지긋한 대머리 할아버지는 손뼉을 치며 어깨를 들썩였다. 한바탕 격정적으로 몰아치던 합주가 끝나자 함성과 휘파람이 뒤섞인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더러는 기립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공연 시작 전의 서먹한 풍경은 온데간데없고 무대와 객석이 하나가 되어 있었다.

    소설가 김훈의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 구절이 떠올랐다. "된장찌개의 위안은 깊다… 이 깊이는 스밈과 우러남에서 온다. 건더기는 국물 속으로 우러나고 국물은 건더기 속으로 스민다. 건더기는 그 고유한 맛을 국물에 내어주고 나서도 건더기로서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때 건더기는 국물의 스밈에 의해 새로운 맛의 건더기로 신생(新生)하는 것인데, 이 조화 속에서의 독자성은 아름답다."

    바비큐 그릴 위에서 돼지 목살이 노릇노릇 익어가던 즈음, 가객 일곱 명이 우리 집을 찾았다. 국악 크로스오버 그룹, 노름마치 단원들이었다. 전날 밤 공연이 끝난 뒤 나는 무대 뒤로 찾아가 땀을 훔치고 있던 이들을 만났고 그 자리에서 저녁 한 끼 대접할 기회를 달라고 청했었다. 반갑고 또 고마운 마음에서였다.

    "김치와 된장찌개밖에 없습니다."

    "외국 공연에 나선 지 벌써 보름째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음식이 뭐가 있겠습니까?"

    밭에서 길러낸 상추와 깻잎, 쑥갓 따위 푸성귀들도 상 위에 올랐다. 바닥난 접시는 웃음꽃과 얘기꽃으로 채웠고, 부족한 풍미는 단원들의 감칠맛 나는 즉석 공연으로 더했다. 아름다운 전통음악으로 캐나다 사람들에게 깊이 스며든 이들 앞에 내놓은 된장찌개. 다행스럽게도 건더기 하나하나가 뭉그러지지 않은 채 꼿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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