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235] 中 청화백자에 담긴 유럽의 과일

조선일보
  •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입력 2018.08.07 03:10

    그림 속 과일들이 지금 막 나무에서 따온 것처럼 생생하다. 금방 자른 석류의 알맹이가 탱글탱글하고, 오렌지 잎사귀에 맺혔던 이슬은 테이블에 떨어져 아직 채 마르지 않았다. 나비 한 마리가 앉은 걸 보니 꽃향기가 좋은 모양인데, 썰어 둔 레몬에서 신맛이 느껴지니 침이 고여 꽃향기를 상상하기 어렵다.

    야콥 판휠스동크, 레몬, 오렌지, 석류가 있는 정물화, 1620~40년경, 목판에 유채, 41.9×49.5㎝, 로스앤젤레스, J. 폴 게티 미술관 소장.
    야콥 판휠스동크, 레몬, 오렌지, 석류가 있는 정물화, 1620~40년경, 목판에 유채, 41.9×49.5㎝, 로스앤젤레스, J. 폴 게티 미술관 소장.
    화가 야콥 판휠스동크(Jacob van Hulsdonck·1582~1647)는 꽃과 과일 전문 정물 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에서 태어났지만, 그림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네덜란드의 미델뷔르흐에서 처음 배웠다. 27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화가들의 성 누가 길드에 장인으로 등록하고 공방을 열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근 40년간 일을 한 셈이다. 오랜 경력에 반해 남은 그의 작품은 100여 점에 불과하다. 우툴두툴한 레몬 껍질, 투명하고 탱탱한 과육, 매끈한 도자기의 질감과 잘려나간 씨앗의 속살까지 만져질 듯 섬세하게 그려내며, 글자 그대로 '장인 정신'을 지키다 보니 다작(多作)이 어려웠을 것이다.

    과일의 노란 빛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그릇은 중국제 청화백자다. 명나라 말기, 특히 만력제(萬曆帝) 시대의 청화백자는 17세기 초부터 유럽 각지에서 비싼 값에 팔려나가며 그 소유주의 부와 취향을 드러내 줬다. 1602년, 네덜란드에서 본격적인 도자기 무역을 위해 설립한 동인도 회사는 창설 초기에는 종종 포르투갈의 무역선을 약탈하는 해적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때 약탈한 도자기를 경매로 판매했던 장소가 바로 미델뷔르흐였다. 400년 전의 레몬 향기도 신선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작은 그릇이 눈앞에 있는 것도 신기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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