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서울시 '갑질'이라며 멀쩡한 그늘막 뽑은 구청장

입력 2018.08.03 03:01

이벌찬 사회부 기자
이벌찬 사회부 기자

지난 30일 서울 중구청 마당에 전에 없던 흉물이 들어섰다. 시민들의 여름나기를 돕기 위해 시청 앞 서울광장 횡단보도에 설치했던 그늘막 4개〈아래 큰 사진〉가 통째로 뽑혀 구청에 옮겨진 것이다.

멀쩡한 그늘막을 뽑아서 전시하라고 지시한 이는 서양호 중구청장이다. 서 구청장은 이날 오전 뙤약볕이 내리쪼이는 구청 마당에 직원 500명을 소집해 "서울시 간부의 요구 때문에 그늘막이 구민을 위한 곳보다 시청 앞에 먼저 설치됐다"고 지적했다. 또 "구민들에게 사과드리는 의미에서 임기가 끝나는 2022년 6월까지 뽑아온 그늘막을 전시하겠다"고 밝혔다. 중구청사 전면에 '늑장행정 눈치행정 반성합니다'라는 현수막도 걸었다. 정치평론가로 유명했던 서 구청장은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행정관을 지냈다.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을 지내다 6·13 선거 당시 더불어민주당에서 전략 공천됐다.

서 구청장이 나서자 일부에서 '서울시가 중구에 갑질을 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사실이 아니다. 시는 지난달 2일 구청에 협조 공문을 보내 '많은 시민이 찾는 서울광장 주변에 그늘막을 조속히 설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정식 행정 절차를 밟은 것이다. 게다가 서울광장은 중구 관할이다. 원래부터 광장 주변에 4개를 설치할 예정이었다. 서 구청장이 언급한 '시 간부'는 서울광장 관리를 담당하는 총무과 직원이었다. 시 관계자는 "올해 폭염이 유난스러워 대책을 일찌감치 마련해달라고 중구청에 협조 공문을 보냈는데 완전히 곡해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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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경 기자

중구에서 그늘막을 뽑아가 버리자 서울시는 부랴부랴 4개를 구매해 원래 자리에 재설치했다. 새 그늘막을 설치하는 데 개당 250만원씩 총 1000만원의 시 예산이 소요됐다. 중구청이 그늘막을 세우고 철거하는 데 쓰인 예산은 820만원이다. 서 구청장의 '그늘막 전시'에 혈세 1820만원이 들어간 것이다.

사상 최악의 폭염이 이어진 2일까지도 중구에는 설치된 그늘막이 1개도 없다. 서 구청장의 호통에 당초 세웠던 그늘막 설치 계획을 전면 취소하고 설치 장소부터 재조사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일러야 오는 7일에 64곳 정도 세워질 예정이다. 최악의 폭염이 지나가고 난 뒤다.

구청 내부에서는 "구청장이 소통이 아니라 호통으로 구 행정을 좌지우지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 중구 직원은 "구청장이 그늘막을 구실로 시를 전면 비판하면서 구정 철학 홍보의 기회로 활용한 것"이라며 "구청 내부에서도 '시민을 위해 설치한 그늘막을 뽑아서 구청 마당에 전시하는 게 시민을 위한 행정이냐'는 비난이 나온다"고 했다. 최근 서 구청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행정은 주민의 삶의 질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옳은 지적이다. 단지 중구의 행정에서 주민의 삶의 질이 우선되는 현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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