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훈, 박선원

서훈 국가정보원장이 4·27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가을 정상회담'을 8월 말로 앞당기는 방안 등을 논의하기 위해 조만간 방북(訪北)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31일 알려졌다. 이와 관련, 서 원장은 최근 국정원장 특보로 기용된 박선원 전 주(駐)상하이 총영사와 함께 지난주 미국을 방문, 사안별 대북 제재 면제와 종전(終戰) 선언 등 북한 관련 현안들을 미국 측과 논의했다고 복수의 정부 관계자가 전했다. 서 원장은 미측과의 조율 결과를 토대로 '대북 제안 패키지'를 마련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정보 소식통은 이날 "가을 정상회담을 당초 예상보다 이른 8월 말 개최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고 했다. 6·12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 이후 비핵화를 둘러싼 미·북 간 이견이 표면화하면서 우리 정부가 조기(早期)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다시 '대화 촉진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판단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달 초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방북 이후 비핵화와 종전 선언을 둘러싼 미·북 간 갈등이 증폭되면서 우리 정부 내에서는 이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9월 초순엔 김정은 정권이 중시하는 정권 수립 70주년 기념일(9월 9일)이 있고, 9월 중순엔 주요국 정상들이 뉴욕에 모이는 유엔 총회가 예정돼 있다. 남북 정상회담이 이런 이벤트들 뒤로 밀릴 경우 예상치 못한 돌발 변수들로 인해 남북 관계를 안정적으로 가져가기가 더 어려울 수 있다는 계산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정부 관계자는 "가을 정상회담이 열리려면 판문점 선언의 골자인 연내 종전 선언(3조)과 남북 관계의 전면적·획기적 개선(1조)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야 한다"며 "서 원장을 비롯해 정부 고위 관리들의 잇따른 방미는 이 문제와 관련 깊다"고 했다. 남북 관계의 전면적·획기적 개선은 미국 주도의 전방위 대북 제재가 어느 정도 풀려야 가능하다. 종전 선언 역시 미국의 동의가 필수적이다. 대북 제재 해제와 종전 선언은 중국이 요구해온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국은 두 사안에 대해 "북한의 비핵화가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은 "제재 해제나 종전 선언을 진지하게 검토하려면 북한이 최소한 핵시설 명단이라도 건네야 한다는 게 트럼프 행정부의 생각"이라고 했다. 지난 25일 마크 램버트 미 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 대행의 방한과 이에 맞춰 이뤄진 폼페이오 장관과 조명균 통일부 장관의 이례적인 통화도 제재 준수를 강조하려는 미국의 의중을 보여준 사례로 거론된다.

서 원장은 방미 기간 폼페이오 국무장관, 지나 해스펠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 등 트럼프 행정부 외교·안보 라인 핵심 인사들을 연쇄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서 원장은 '북한에 실질적 비핵화 조치를 설득하려면 남북 정상회담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선 미국이 종전 선언과 대북 제재 문제에서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취지로 미측을 설득한 것으로 전해졌다.

서 원장 일행은 방미 결과를 정부 핵심 관계자들과 공유하고 북한에 직접 전할 메시지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장 종전 선언은 어렵지만 개성공단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운영과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대북 제재의 일시적 유예 등을 '당근'으로 제시할 가능성이 점쳐진다. 대북 소식통은 "이 사안들은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의 재개를 위해 우리 정부가 노력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어 북측이 흥미를 보일 것"이라고 했다.

경기대 남주홍 교수는 "북한의 의도는 종전 선언 채택을 명분으로 내세워 제재 이완이란 실리를 취하겠다는 것"이라며 "평창올림픽 때 우리 정부가 취한 5·24 조치의 예외 적용이 되풀이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북한 사정에 밝은 소식통은 "이례적인 폭염이 북한의 작황에도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며 "정권 수립 70주년을 대대적으로 자축해야 하는 김정은 정권으로선 제재의 숨통을 틔우는 게 무엇보다 급선무"라고 했다.

서 원장이 박선원 전 총영사를 대동한 것에 대해 외교 소식통은 "박 전 총영사를 미측에 소개하는 상견례 목적도 있었다"고 했다. 노무현 정권의 외교 안보 실세였던 박 전 총영사는 한·미 동맹보다 남북 관계를 중시하는 '자주파'로 미측과 불편한 관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 안팎에서는 박 전 총영사에게 향후 남북관계 관련 중책을 맡길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서 원장의 방미는 양제츠 중국 공산당 정치국 위원의 극비 방한(7월 15일 전후)→ 강경화 외교장관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의 방미(7월 19·20일)→ 쿵쉬안유 중국 외교부 부부장의 방북(7월 25일)→ 램버트 대행의 방한(〃)에 이어 이뤄졌다. 종전 선언과 대북 제재 등 한반도 이슈를 놓고 남·북·미·중 간의 치열한 외교전이 펼쳐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책연구소 관계자는 "한국은 남북 대화 동력의 유지, 북한은 비핵화 시간 끌기와 제재 해제, 중국은 대(對)한반도 영향력 확대, 미국은 대북 제재를 통한 비핵화의 진전을 각각 중시하고 있다"며 "북한의 논리에만 휘둘리지 말고 4자 간의 교집합을 토대로 북한의 전향적 조치를 끌어내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