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전시실에서 이 그림과 마주쳤을 때 흠칫 놀라 팔을 휘저었다. 그림 위에 파리 한 마리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도 그림이었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 0.1초 정도 걸렸다. 붓과 물감으로 대상의 세부를 초고화질 사진보다 정교하게 묘사한 수많은 거장의 놀라운 그림들을 이미 봤으니 웬만한 눈속임에는 넘어가지 않는데, 설마 귀부인의 머리 위에 파리를 그려 넣었을 줄이야.

슈바벤의 화가, 호퍼가(家) 여인의 초상, 1470년경, 목판에 유채, 53.7×40.8㎝,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현재 독일의 남서부를 일컫는 슈바벤 지역의 화가가 그린 이 초상화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그림 상단에 쓰여 있는 대로 '호퍼(Hofer)가의 여인'이라는 것 이외에는 알려진 게 없다. 초상화를 주문한 것부터 그렇거니와 고급스러운 직물에 모피를 두른 외투, 빳빳한 면직을 섬세하게 바느질해 주름 잡은 머리 장식 등을 보면 대단히 부유한 집안의 여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왼손으로 파란 물망초(勿忘草)를 살포시 쥐고 있다. 15세기 독일에서는 글자 그대로 '나를 잊지 말아요'라는 뜻의 이 꽃을 달고 있으면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잊히지 않는다고 믿었다. 죽음의 상징인 파리를 머리에 이고 물망초를 들고 있는 이 여인은 초상화를 주문해 두고 자기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남은 이들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죽음 이후를 염려하는 그 뜻은 우울하지만 그림은 유쾌하다. 물론 화가는 파리 한 마리를 잡아다 놓고 돋보기로 들여다보며 그림을 그렸겠지만, 그림 속 여인의 눈동자와 입매를 보면 마치 머리 위에 앉은 파리가 날아갈까 애써 웃음을 참으며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림 앞에서 놀라 파리를 날리려는 관람객을 그녀가 어디선가 내려다본다면 박장대소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