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칼럼] 미국 믿지 마라, 일본 일어서고, 중국 되 나온다

조선일보
  • 박정훈 논설위원
    입력 2018.07.27 03:17

    70년 전 민중도 강대국 믿지 말라 했다
    국익이 격돌하는 정글 같은 세상… 우리에겐 어떤 국가 전략이 있나

    박정훈 논설위원
    박정훈 논설위원

    우리가 트럼프 대통령을 못 믿게 된 것은 대책 없는 말 뒤집기 때문이다. 북핵 폐기의 원칙을 180도 뒤집었다. 당장 핵 폐기를 안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더니 이젠 "시간제한이 없다"고 한다. 북한의 시간 벌기를 사실상 용인하고 있다. 핵 폐기는 뒷전이고 미군 유해에 더 열 올리는 듯하다. 이대로면 비핵화는 물 건너가고 우리는 영원히 핵을 머리에 이고 살아야 할지 모른다. 트럼프의 '사기극'에 당했다는 분노가 터져 나오고 있다.

    70여년 전 해방 직후 민중 사이에 유행한 민요가 있다.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놈에 속지 마라, 일본놈 일어나고 되놈(중국) 되(다시) 나온다….' 나라 이름에 운율까지 맞춰 강대국의 속셈을 풍자했다. 민족이 가야 할 방향을 놓고 갑론을박하던 혼돈의 시대였다. 갓 해방된 약소국 민중의 눈에도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이 보였던 모양이다. 민요는 강대국에 선의(善意)란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믿을 놈 하나 없으니 정신 차리자고 했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에서 발을 빼려 하고 있었다. 남한 주둔 미군 7만여명을 다 철수시켰다. 탱크 한 대, 비행기 한 대 안 남기고 국군을 껍데기로 만들었다. 이윽고 한반도를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애치슨 라인'이 발표됐다.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본다는 선언이었다. 북한에 보낸 '남침(南侵) 초대장'이기도 했다. 해방군으로 알았던 미국이 한국을 버리려 했다. '미국놈 믿지 마라'는 민요는 이런 시대 상황을 반영했을 것이다.

    그 후 역사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소련놈에 속지 마라'는 구절대로 소련은 북한의 남침을 뒤에서 후원했다. 전차와 중화기, 차관을 빙자한 전비(戰費)를 제공하고 작전 계획까지 짜주었다. 중국은 6·25 발발 넉 달 만에 한반도에 '다시 나왔다'. 수십만 군대를 보내 코앞까지 온 통일을 막았다. 일본은 '일어났다'. 6·25 특수(特需) 덕에 호황을 누리며 경제 대국이 됐다. 무서울 만큼 딱딱 맞아떨어졌다. 국제 정세를 꿰뚫어본 민중의 집단 지성에 감탄이 나온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다. 지금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 70년 전 민요와 다르지 않다. 미국은 못 믿을 존재가 돼가고 있다. 안보에선 '착한 동맹', 경제에선 '좋은 파트너'이던 과거의 미국이 아니다. 트럼프는 동맹에도 '상업적 계산법'을 들이대고 있다. 한반도에 전략 자산을 전개하는 것이 "매우 비싸고 미친 짓"이라며 미군 철수 가능성까지 입에 올렸다. 이제 최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둘 상황이 됐다. 미국이 ICBM 폐기 같은 자기 목표만 챙기고 북핵은 미봉(彌縫)할지 모른다.

    경제에서도 미국을 파트너라 하기 민망한 상황이 됐다. 한·미 FTA로 '경제 동맹'이 맺어졌다고 축배를 든 게 6년 전이다. 지금 미국의 무차별 무역 보복이 우리에게까지 쏟아지고 있다. 중국이 주타깃이라지만 한국을 봐주는 것도 없다. 오히려 우리 주력 수출품인 자동차에도 관세 폭탄을 때리겠다고 한다. 서로 최혜국 대우해주는 FTA 체제를 해체하겠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런 미국을 믿고만 있어도 되나.

    중국은 패권 본능을 되찾았다. 사드 보복 때의 패권적 행태가 생생하다. 상식도, 국가 간 예의도 없었다. 무지막지한 보복의 칼날을 휘두르며 힘으로 우리를 굴복시키려 했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중국이 '굴기(�起)'를 완성하는 순간 종주국 행세를 하려 들지 모른다. 일본은 또 어떤가. 경제 회생으로 자신감을 회복한 일본 역시 우리에게 날을 세우며 국익의 시비를 걸어오고 있다. 온 사방에 눈 감으면 코 베어 갈 적으로 가득하다.

    해방 이후 국제 환경은 격랑을 거듭했지만 변하지 않은 게 있다. 나라 간 관계에 선의란 없다는 사실이다. 존재하는 것은 자국 이기주의뿐이다. 천우신조로 우리에겐 국제 관계의 본질을 꿰뚫어 본 전략적 지도자가 있었다. 이승만은 군사 동맹이라는 '신의 한 수'로 미국을 묶어두는 데 성공했다. 박정희는 원수 같던 일본에 올라타 경제 개발의 동력을 창출해냈다. 국가의 명운을 바꾼 결정이었다. 이 두 가지 전략적 선택이 대한민국 현대사의 골격을 만들었다.

    지금 우리의 통치 엘리트에게 어떤 전략이 있는지 모르겠다. 이 정권은 주류 세력 교체를 말한다. 그것이 정권의 목표일 수는 있지만 국가 전략이 될 수는 없다. 밖에선 살벌한 국익 쟁탈전이 벌어졌는데 정권의 시선은 안으로만 향해 있다. 밖에서 국익을 키울 생각보다 안에서 편 갈라 싸움 붙이는 일로 날 새우고 있다. 강대국 이기주의가 격돌하는 정글 같은 세상에서 이렇게 한가해도 될까. 이렇게 귀 막고 눈 감고 있다가 나라가 정말 온전할 수 있을까.

    70년 전 민중도 믿을 건 우리뿐이라고 했다. 그때 민요의 마지막 구절은 '조선놈 조심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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