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의 소설가, 최인훈 별세

입력 2018.07.23 12:20 | 수정 2018.07.23 16:34

소설가 최인훈. /조선일보DB
소설가 최인훈(84)씨가 23일 오전 10시46분 대장암 투병 끝에 입원 중이던 경기 고양시 명지병원에서 별세했다.

함경북도 회령 출신으로 6·25전쟁 당시 월남한 최씨는 1959년 단편 ‘그레이 그락부 전말기’와 ‘라울전’으로 등단한 뒤 1960년 남북한을 제3의 시선으로 비판한 소설 ‘광장’을 발표해 냉전 이데올로기 극복을 지향하는 작가로 떠올랐다.

최씨는 “문학 창작은 일종의 사고실험(思考實驗)”이라며 지식인의 고뇌를 탐구한 소설로 분단 시대를 잇달아 조명했다. 관념 소설 ‘화두’와 ‘회색인’ ‘서유기’ 뿐 아니라 풍자 소설 ‘총독의 소리’, 고전 패러디 소설 ‘구운몽’ 등 다양한 소설 양식도 실험했다. 전통 설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희곡집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와 현실과 예술을 풀이한 평론집 ‘문학과 이데올로기’도 냈다. ‘최인훈 전집’(15권)을 남겼고, 동인문학상·이산문학상·한국연극영화예술상 희곡상 등을 받았다.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를 지내며 수많은 문인들을 길렀다. 대표작 ‘광장’은 영어를 비롯해 6개국어로 번역됐다.

최씨는 지난 2015년 경기 고양시 자택에서 국내외 연구자들과 나눈 공개 대담을 통해 “6·25 때 원산에서 내려온 내 문학은 피란민의 문학”이라며 “최인훈이란 피란민 작가가 현대 한국이란 원더랜드(이상한 나라)를 헤매고 다닌 셈”이라고 자신의 문학 세계를 요약한 적이 있다. 최인훈 문학은 분단 시대를 남한에서 겪은 피란민 지식인의 이방인 의식과 고뇌를 표출했다는 것이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자 “울먹이는 소리로 독재자의 죽음을 알리는 북쪽 아나운서의 문화 양식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며 “20세기에 가장 열악한 방식으로 역사에 동원된 우리들의 운명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함경북도 회령에서 목재상인 집안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최씨는 6·25전쟁이 터진 그 해 12월 가족과 함께 월남했다. 목포고등학교를 다닌 뒤 서울대학교 법대에 진학했지만 문학에 더 큰 뜻을 둬 자퇴하곤 입대해 육군 통역·정훈 장교를 지내며 틈틈이 소설 습작을 했다고 한다.

1959년 단편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와 ‘라울전’이 자유문학에 추천돼 등단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사상의 자유가 확대되자 냉전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남북한을 제3의 시선으로 비판한 소설 ‘광장’을 발표했고, 지금껏 204쇄 70여 만부를 찍는 동안 분단 시대 한국 젊은이의 필독서로 꼽혀왔다.

소설 ‘광장’은 남한의 천박한 이기주의를 ‘광장이 없는 밀실’로, 북한의 획일적 전체주의를 ‘밀실이 없는 광장’에 비유해 모두 비판했다. 남한 출신의 청년 이명준이 분단 직후 월북했다가 6·25 때 북한군으로 내려와 포로가 되는데 종전 이후 남북한 모두 혐오한 나머지 제3국 인도를 선택해 배를 타고 가던 중 바다에 투신한다는 비극이다. 작가는 서문에서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라며 “인간을 이 두 가지 어느 한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고 써서 밀실과 광장이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꿈꿨다.

‘광장’이 사실주의 소설이라면 소설 ‘회색인’과 ‘서유기’는 에세이 기법으로 지식인의 고뇌를 그린 관념 소설이고, 소설 ‘가면고’는 환상적 사고실험의 산물이다. 소설 ‘구운몽’과 ‘금오신화’는 고전 소설을 패러디해 분단 시대의 상황을 현대적 괴담으로 묘사했다. 1970년대 이후 희곡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를 비롯 전통 설화를 재해석한 작품을 잇달아 써내 한국 연극의 기폭제가 됐지만, 소설 창작은 중단했다. 이후 1994년 20년만에 소설 ‘화두’(전 2권)를 냈다. 20세기 한국사 체험을 성찰한 소설 ‘화두’에 대해 그는 “인생의 어떤 시기에는 자기 생애가 문득 소설처럼 바라보이는 시기가 있다”며 “소설 ‘화두’에 내 모든 게 들어있다”고 했다.

작가는 2001년 서울예대 교수직에서 정년 퇴임한 뒤 2005년 산문집 ‘길에 관한 명상’을 낸 것을 끝으로 사실상 절필한 채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그가 기른 제자로는 소설가 강영숙·심상대·하성란·신경숙·윤성희 등이 있다. 그는 2015년 팔순을 맞아 제자 50여 명이 마련한 모임에서 “문학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며 “모범답안이 없다”고 밝힌 뒤 다시 칩거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원영희씨와 아들 윤구, 딸 윤경씨가 있다. 장례는 문학인장(장례위원장 김병익)으로 치러지고,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다. 영결식은 25일 오전 8시, 발인은 25일 오전 9시. (02)2072-2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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