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단 한 번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똥별, 김중식(51) 시인은 그 운명을 택했으되, 결국 먼 길을 돌아 집으로 회귀한 것이다. 압도적 찬사를 받은 첫 시집 '황금빛 모서리'(1993) 이후 돌연 절필했던 그가 25년 만에 두 번째 시집으로 돌아왔다. "밤에 시 쓰다 잠깐 고개를 들면 어느새 동이 터오곤 했다. 그 황홀경을 끝내 잊지 못했다. 다시 고개 들었더니 25년이 지나갔다."

김중식 시인은 옛 국민의당 연구소‘국민정책연구원’에서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혹시나 힘들게 살까봐 아들딸에게는 시(詩) 근처엔 얼씬도 못하게 했다”며“다행히도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이번 시집 제목 '울지도 못했다'는 수록작 '늦은 귀가' 마지막 문장에서 따왔다. '나는 내가 지난 세월에 얼마나 날뛰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울지도 못했다'는 자백. "좋게 말해 방황이고, 인생을 낭비했다. 주변에 많은 사랑을 주지도 못했고, 사회에 딱히 기여한 것도 없다. 너무 많은 죄를 지어 내 고통에 대해선 울 면목도 없다는 의미가 될 수 있겠다."

1995년 들어간 첫 직장에서 10년간 신문사 기자로 일했다. 그리고 시를 끊었다. "젊은 시절 가장 큰 고통이 경제적 부자유였다. 장결핵을 앓았을 때, 병들어서라도 하고 싶은 짓만 하고 싶었다. 하지만 행복하려면 밥벌이가 돼야 한다. 당시의 나는 근본주의자였다. 직장 다니는 작가는 전부 가짜로 여겼다. 하루 대부분의 힘을 엄한 데 바치고 밤에 한두 시간씩 쓰는 건 견딜 수 없는 모독이었다."

시어를 잊자 정치의 언어가 찾아왔다. "신문사 그만두고, 후배 소개로 국정홍보처에 지원해 일했다. 참여정부 마지막 해, 대통령이 남기려는 정책 유산을 정리해 책으로 묶는 일이었다." 1년 뒤 정권이 바뀌었고, 사무실은 해체됐다. "계약직이었으니 나도 떨어져 나갔다. 그러다 운 좋게 그해 가을 미래기획위원회, 이듬해 봄 청와대 연설비서관실에서 연락이 왔다." 3년간 대통령 연설문을 썼다. "연설문은 대통령의 언어다. 그의 의중을 읽어야 했다. MB는 난해하거나 닭살 돋는 말을 싫어했다. 실용적이고 메시지가 명확해야 좋아했다. '비 올 때는 우산을 뺏지 말아야 한다'처럼. 다만 검토 과정을 거치면 초안 반영률은 3할도 안 됐다." 거의 수정 없이 통과된 원고는 2010년 '천안함' 연설문이었다. "전사자 46명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면서 대통령이 눈물을 흘렸다. 그런 일은 드물다."

남의 언어를 부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속에 불구덩이가 생겼다. 먼 데로 떠나고 싶었다." 자원해 2012년 주이란대사관 문화홍보관이 돼 테헤란으로 갔고, 3년 반을 사막 기후에서 살았다. "대학 시절 내가 느낀 세상은 앞이 안 보이는 사막이고 불모였다. 말이 씨가 됐나 보다." 그 불볕 땅에서 시작(詩作) 메모 대부분을 완성하고, 지옥·연옥·천국을 거치는 단테의 '신곡' 구조에 착안해 시집을 꾸렸다. "1·2부는 첫 시집의 암울한 정서와 유사한데, 3부에서 천국이라는 한 줄기 가능성을 내비친다. 진부하지만 그 가능성은 사랑이다. 나는 정말이지 그간 사랑이라는 걸 모르고 살았다." 그는 시집 마지막에 '우리는 다가가면서 멀어질지라도/ 봄에 할 일은/ 꽃을 피우는 것'(물결무늬 사막에서)이라 썼다.

그 꽃은 가족일 것이다. 그는 "첫 시집은 어머니께, 두 번째 시집은 아내에게 바친다"고 했다. "나를 낳은 건 엄마지만, 나를 키운 건 아내다. 칠남매 홀로 건사한 할머니, 하루 열여섯 시간 일하며 자식 대학까지 보낸 어머니…. 이 세상의 끝에 여성이 있는 것 같다. 세 번째 시집이 나온다면 내 딸을 포함한 이 세상의 딸들에게 바치고 싶다."

'헤매다 보면 종점이었다'(어쩌다 종점)는 고백은 다시 집으로 걸음을 옮겨야 하는 운명을 예비하고 있다. 그는 "청춘과 지금의 나 모두를 구해준 건 시"라고 말했다. 지금껏 회자되는 대표시 '식당에 딸린 방 한 칸' 마지막 문장처럼 '내가 무수히 떠났으되 결국은 돌아오게 된, 눈물겨운' 세상 끝의 집으로 그는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