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 스토리] ‘괴짜 감독’ 사우스게이트, 잉글랜드의 새 희망 되다

입력 2018.07.12 17:16 | 수정 2018.07.13 08:15

축구를 잃고 영웅을 얻었다. 52년 만의 월드컵 우승 도전이 좌절되면서 ‘축구 종가’는 또 한번 작아졌지만 잉글랜드 국민들은 새 희망을 봤다. ‘젠틀한 괴짜’, 개러스 사우스게이트(47) 감독 때문이다.

잉글랜드는 12일(한국 시각) 러시아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크로아티아와의 4강전에서 1대 2로 패했다. 전반 5분 만에 키어런 트리피어의 선제골로 앞서 나가는 듯 했으나, 후반 22분 크로아티아의 이반 페리시치에게 동점골을 내주고 연장 후반 마리오 만주키치에게 역전골까지 허용하며 무릎을 꿇었다. 1966 잉글랜드 월드컵 우승의 재현은 그렇게 물거품이 됐다.

응원가 후렴구 “Football’s coming home(‘축구가 집으로 오고 있다’·우승컵이 축구의 발원지로 돌아온다는 의미)”이 잦아들고 장내에는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악명높은 잉글랜드 훌리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경기가 끝나고 상대 팀 감독을 끌어안은 사우스게이트의 영향이었다. 이후로도 한참 동안이나 양쪽 선수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은 그의 모습은 잉글랜드 축구의 새 상징이 됐다.

개러스 사우스게이트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2018년 7월 7일 스웨덴전과의 경기에서 승리한 후 팬들이 부르는 응원가를 지휘하고 있다. / 닉스블랙
◇ 극복한 자의 포옹…“사우스게이트, 잉글랜드에 승리 안긴 21세기 처칠”

사우스게이트는 2018 러시아 월드컵이 낳은 잉글랜드 최고의 스타다. 유독 큰 대회에 약한 ‘삼사자 군단’을 28년 만에 월드컵 4강 무대로 이끌며 전 세계 축구 팬들을 사로잡았다. 그가 매 경기마다 선보인 ‘조끼 패션’은 잉글랜드 전역에 ‘조끼 열풍’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비(非)축구 팬들마저 사우스게이트에 푹 빠진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그의 ‘품위’다.

잉글랜드가 지난 4일 콜롬비아와의 경기에서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8강에 진출했을 때의 일이다. 잉글랜드는 3번 키커 조던 헨더슨의 실축으로 위기에 빠졌지만 콜롬비아 4번 키커 마테우스 우리베의 슈팅이 벗어나면서 기사회생했다. 이어 콜롬비아 마지막 키커 카를로스 바카의 슈팅을 골키퍼 조던 픽퍼드가 막아내고 잉글랜드 마지막 주자 에릭 다이어가 골을 넣으면서 승리가 확정됐다.

환호도 잠시, 관중과 카메라의 이목은 사우스게이트에게 집중됐다. 자신의 실축을 탓하며 눈물을 쏟는 콜롬비아의 우리베를 그가 두 팔로 감싸안았기 때문이다. 중계석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사우스게이트는 1996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준결승 승부차기 때 페널티킥을 실축했던 장본인이다. 잉글랜드는 사우스게이트의 실축으로 그해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개러스 사우스게이트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2018년 7월 4일 콜롬비아의 마테우스 우리베 선수를 안으며 위로하고 있다. / BBC
해외 언론은 그의 포옹에 극찬을 보냈다. ESPN의 존 크레이스는 가디언에 보낸 기고문에서 “사우스게이트는 한 나라의 꿈을 무너뜨리는 당사자가 되는 게 어떤 심정인지 안다”며 “우리베의 어깨를 감싼 그의 팔은 그저 가볍게 지나가는 몸짓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를 향한 깊은 이해를 보여주는 행동이었다”고 했다.

크레이스는 사우스게이트가 진정한 에티켓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다고도 했다. 그는 “1996년 승부차기 이후 고통의 세월을 보낸 잉글랜드가 지난 22년 간 배운 ‘실패 대처법’은 소리를 크게 지르거나 화를 내거나, 경적을 울리며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우스게이트가 이를 통해 배운 건 기본적인 예절이었다”며 “그는 잉글랜드 국민들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줬다”고 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사우스게이트가 잉글랜드 뿐 아니라 영국에게도 한줄기 희망을 선사했다고 평가했다. 유럽연합 탈퇴와 테레사 메이 내각의 줄사퇴, 러시아의 스파이 독살 의혹 등 험난한 시기를 겪고 있는 영국에게 ‘모두 잘 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줬다는 것이다.

1996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이후 역적으로 몰린 사우스게이트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승부차기 전술에 매달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6강전이 열리기 전 BBC와의 인터뷰에서 “22년 동안 그 상황을 떠올리며 승부차기를 연구했다”고 밝혔으며, 가디언은 그가 지난 3월부터 키커가 압박에 대처하는 전략과 센터서클까지 걸어오는 방법 등 선수들에게 다양한 상황을 준비시켰다고 전했다. 그리고 그는 결국 이번 월드컵에서 지긋지긋한 승부차기의 악몽을 떨쳐냈다.

영국 ‘데일리메일’의 올리버 홀트 수석 스포츠 기자는 사우스게이트의 승리가 “한 세대 동안 잉글랜드 국민과 잉글랜드를 괴롭혀 온 두려움과 의심에 대한 승리”라고 했다. 텔레그래프와 아이리쉬타임스는 그를 ‘21세기 윈스턴 처칠’에 비유했다.

◇ ‘괴짜 덕장’ 사우스게이트…선수들 유격훈련에 NFL·NBA 전술도 응용

사우스게이트의 인기가 치솟으면서 그의 ‘괴짜’ 리더십도 주목을 받고 있다. 모래알 조직력으로 국제대회에서 매번 부진했던 잉글랜드가 이번 월드컵에서는 확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영국 ‘더 선’에 따르면, 사우스게이트는 월드컵에 앞서 선수들에게 군사훈련을 받게 하며 정신무장부터 시켰다. 지난해 6월 팀을 이끌고 이틀 간 해병대 캠프에 들어간 그는 선수들과 함께 진흙탕에 뒹굴며 협동심을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우스게이트는 더 선에 “선수들을 예측 불가능한 곳으로 데려가고 싶었다”며 “선수들이 스트레스를 받거나 새로운 환경에 닥치더라도 금방 적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고 설명했다.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2017년 6월 영국 해병대 기지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 / 더 선
사우스게이트는 축구 전술을 짜기 위해 미국프로풋볼(NFL)과 미국프로농구(NBA)를 관전하는 독특한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탄생한 세트피스(코너킥이나 프리킥을 얻었을 때 공격수들이 골을 넣기 위해 작전을 구사하는 행위) 전술은 잉글랜드가 이번 대회에서 기록한 11골 중 8골을 이끌어내며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잉글랜드는 이번 월드컵 4강에 진출한 팀 중 세트피스 득점률이 가장 높다. 8강전에서도 세트피스 상황에서 2골을 터뜨려 43년 만에 스웨덴을 무너뜨렸다.

사우스게이트의 ‘덕장’ 면모도 잉글랜드의 선전과 인기를 뒷받침했다. 16강전을 앞두고 미드필더 파비안 델프를 아내의 출산 예정일에 맞춰 귀국시킨 일이 대표적이다.

당시 사우스게이트는 “인생에는 축구보다 중요한 게 몇 가지 있다. 선수들에게 이 경기는 매우 중요하지만 그래도 가족이 더 소중하다”며 델프의 선택을 지지한 것으로 전해졌다. “모두가 월드컵에 출전할 기회는 단 한번 뿐일지 모른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서 그 아이가 태어나는 날도 단 하루 뿐이다”는 그의 어록은 소식을 접한 모두에게 감동을 안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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