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사시사철 오를 때마다 감탄, 우리만 보기엔 아깝지

조선일보
  • 박상현 캐나다 부처트 가든 정원사·수필가
    입력 2018.07.13 03:00

    [박상현의 안단테로 살아보니] 일상이 된 아주 특별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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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책 삼아 올라간 산 정상에서 저 멀리 만년설을 머리에 인 베이커산이 보였다. 돈 들여 멀리 가는 것만이 휴가가 아니다. 일상을 새로운 각도로 보면 힐링의 순간이 나타난다. / 박상현
    등굣길을 서두르던 아이가 곰돌이 인형을 책가방에 집어넣었다. 왜 학교에 인형을 가져가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쇼 앤드 텔(Show and Tell) 시간에 보여주게."

    캐나다에서 아이가 막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던, 10여 년 전의 일이었다. '쇼 앤드 텔' 시간은 새로 전학 온 아이가 급우들과 쉽게 친해질 수 있는 기회로, 특별히 자랑거리가 있는 아이에게는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자리로 마련된다. 물론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발표력도 키워주고 교육적인 목적도 있을 것이다. 대개 소중한 장난감, 여행지에서 사온 기념품 혹은 의미 있는 사진 등이 단골손님이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이 문화는 자연히 이어진다.

    월요일 아침. 막 출근한 동료들은 여지없이 '쇼 앤드 텔' 시간으로 한 주를 시작한다. 더워진 날씨에 호수에서 수영했다는 여자 동료는 발그스름하게 익은 목을 내밀며 즐거운 표정이다. 막 돌이 되어가는 아이와 주말 내내 지냈다는 아빠는 휴대전화에 저장된 비디오를 보여주며 행복한 미소를 감추지 못한다. 다들 돌아가며 한마디씩 한 동료의 시선이 천천히 나에게로 향한다.

    "음…. 나도 보여 줄 게 있지."

    모처럼 주말에 아이들과 함께 낚시를 갔던 나는 휴대폰을 꺼내 잡아 올린 연어 사진을 보여준다. 물고기가 어찌나 힘을 쓰던지 겨우 올렸다는 무용담도 곁들인다. 그래도 뭔가를 내보이며 얘기할 거리가 있어서 다행인 날이다.

    어른들의 '쇼 앤드 텔' 놀이는 휴가철이 되면 좀 더 심각해진다. 벌써 일본 여행을 하겠다는 싱글, 가족과 함께 로키산맥으로 캠핑을 가겠다는 동료도 있다. 올여름에는 나도 좀 색다른 계획을 세워봐야 할 것 같은데 아내가 선뜻 동의해줄지 걱정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두고 어디로 또 여행을 간다는 거야."

    주말이면 꼭 찾는 산책길에서 아내는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한다. 집에서 차를 타고 딱 5분만 가면 되는 천문대에 오르는 길이다. 올해로 문을 연 지 100년이 된 이곳은 우리 부부의 '일상이 된 아주 특별한 곳'이다.

    입구에 주차하고 문을 들어서면 바로 산책로가 시작된다. 완만한 경사, 잘 포장된 길은 주말엔 오가는 차들도 거의 없어 더할 나위 없이 한적한 산책로가 된다. 자전거를 타고 오르내리는 이들, 강아지와 함께 나선 노인들, 조깅 팬츠를 입고 뛰어가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철마다 바뀌는 주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은 덤이다. 겨울에는 암벽 위에 고드름이 매달리고 날이 풀리기 시작하면 연령초, 꿩의비름, 휴케라 같은 야생화들이 번갈아 피어난다. 기온 차가 큰 즈음에는 숲속에서 안개가 피어나 신비로움을 더해주고, 사냥감을 찾기 위해 머리 위를 맴도는 독수리나 매를 만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채 한 시간도 못 돼 다다른 정상에는 그 어느 곳에서도 보기 어려운 장관이 눈앞에 펼쳐진다. 한눈에 들어오는 호수와 바다, 그리고 산과 섬들. 물은 여백의 공간으로, 산은 채워주는 존재로 서로 의지하며 우리를 맞는다. 울창한 침엽수로 뒤덮인 산자락 끝에 자리 잡은 호수는 짙푸르고, 시원한 바다 위에 올망졸망 떠있는 섬들은 정겹다. 그중에서도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서 있는 베이커산은 화룡점정(畵龍點睛)처럼 우뚝하다.

    정상에 놓여 있는 벤치에 앉아 물 한 모금 마시고 산들거리는 바람결에 몸을 맡기면 하늘을 나는 새들의 기분이 이렇지 않을까 싶어진다. 우리 둘만 보고 즐기기엔 너무도 귀하고 아까운 풍경이다.

    "항상 봐도 정말 아름답단 말이야. 돈 들여서 가긴 어딜 가. 이렇게 좋은데."

    독심술이라도 있는 것인 양 아내가 선수를 친다.

    "그러긴 하지. 최고라니깐. 그래도 올여름엔 저기 만년설이 쌓인 산에 올라가 볼까?"

    순간, 아내의 눈빛이 조금 흔들리는 것 같았다. 잘하면 올여름엔 나도 '쇼 앤드 텔' 거리 하나 제대로 챙길 수 있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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