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 타며 국내 進攻 훈련하던 광복군… 일제 항복하자 "스스로 나라 못찾아" 비통

입력 2018.07.12 03:15

[백범과 臨政 시련의 피란길 5000㎞를 가다] [3·끝] 시안
광복군 제2지대 주둔했던 두취진, 韓·中 협력해 4년전 기념비 세워

한국광복군 제2지대가 주둔했던 중국 산시성 시안 두취진에 이를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광복군 기념비는 한·중 정부 협력으로 70여 년 만인 지난 2014년 세워졌다.
한국광복군 제2지대가 주둔했던 중국 산시성 시안 두취진에 이를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광복군 기념비는 한·중 정부 협력으로 70여 년 만인 지난 2014년 세워졌다. /이슬비 기자
9일 찾은 중국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의 중난산(終南山·종남산) 자락. 시안 시내에서 남쪽으로 약 40㎞ 떨어진 이곳에는 588년 수나라 때 세워진 미터구사(彌陀古寺·미타고사)라는 고찰(古刹)이 있었다. 미터구사를 왼쪽으로 끼고 산길을 30분 정도 걸어 올라가자, 절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깎아지른듯한 바위 절벽이 나타났다.

이곳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이 미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첩보부대(OSS)와 함께 극비리에 국내 진공(進攻)을 위한 훈련을 하던 장소다. 백범 김구 선생은 1945년 8월 7일 시안에서 OSS 초대 수장인 윌리엄 도너번 장군과 만나 국내 진공 작전에 합의했다. 이후 광복군은 미군 교관의 지도 아래 군사 훈련을 했다.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 "중난산 봉우리에서 오로지 밧줄만을 지닌 청년들이 매듭을 짓고, 절벽을 오르내렸다. (미국 교관으로부터) '중국 학생들에게도 발견하지 못한 해답을 귀국(貴國) 청년들에게서 발견했다. 참으로 전도유망한 국민이오'라는 찬사를 받았다"고 썼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사실을 모르는 동네 주민들만 이따금 산을 오를 뿐 광복군의 당시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미터구사에서 북쪽으로 차로 30분쯤 달리자 OSS 훈련을 받은 광복군 제2지대가 주둔했던 두취(杜曲·두곡)진이 나왔다. 두취진에 들어서자 '광복군 기념비'가 눈에 띄었다. 이 기념비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3년 시안에서 자오정융(趙正永) 산시성 당서기와 만나 요청해 2014년 4월에 세워졌다. 기념비엔 한국어와 중국어로 '한국광복군 제2지대는 1942년 9월 항일 투쟁이 격렬하게 진행됨에 따라 (충칭에서) 시안 두취진으로 본부를 이전했다. 중·한 인민이 함께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과 압박에 맞서 싸웠던 역사를 기념하고 항일 승리에 기여한 바를 기리기 위해 특별히 이곳에 기념비를 세웠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광복군 제2지대는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범석 장군의 지휘 아래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 장준하 전 사상계 대표 등이 활동한 부대다. OSS와 함께 이들이 추진했던 국내 진공 작전은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을 선언하면서 실행되지 못했다. 백범은 스스로 나라를 되찾지 못했다는 사실에 비통해했다.

80년 전 시안은 광복군의 주 활동지였다. 백범은 1940년 9월 임시정부 대가족을 충칭(重慶)에 안착시키고 나서 두 달 후인 11월 전선과 가까운 시안으로 한국광복군총사령부를 옮겨 중국 각지에 흩어진 무장 세력을 흡수했다. 총사령부는 시안 얼푸(二府)가 4호의 2층짜리 목조건물에, 무정부주의 청년 조직으로 광복군에 편입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같은 거리 29호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현재 시안 시내에는 과거 광복군이 주둔했다는 사실을 알려줄 만한 표지가 없다. 총사령부 부지는 1995년 도로 확장을 하며 사라졌고,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있던 자리도 중급인민법원이 들어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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