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폭우는 '재해 약자' 노인을 때렸다

입력 2018.07.12 03:01

사망·실종 왜 200명 넘었나
최대 피해지 사망 80% 70세 넘어… 대부분 집에서 버티다 희생돼

무릎 꿇은 아베 - 아베 신조(오른쪽) 일본 총리가 11일 폭우로 46명이 희생된 오카야마(岡山)현 구라시키(倉敷)시 마비초(眞備町)의 주민 대피소를 찾아 무릎 꿇고 이재민들을 위로하고 있다.
무릎 꿇은 아베 - 아베 신조(오른쪽) 일본 총리가 11일 폭우로 46명이 희생된 오카야마(岡山)현 구라시키(倉敷)시 마비초(眞備町)의 주민 대피소를 찾아 무릎 꿇고 이재민들을 위로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방재(防災) 강국 일본' 신화는 무너진 걸까. 기록적인 폭우가 내렸다고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안전 시스템이 잘 돼 있다는 나라에서 어떻게 3~4일 동안 200명이 넘게 목숨을 잃거나 실종되는 사태가 벌어진 걸까.

일본 정부 발표에 따르면 지난 5~7일 사흘간 내린 폭우로 11일 현재 169명이 사망하고, 79명이 실종됐다. 시간이 갈수록 피해가 늘고 있어 1982년 299명이 사망한 나가사키(長崎) 수해 이후 최대의 폭우 피해로 기록될 전망이다.

이번 폭우가 상상을 뛰어넘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본 고치(高知)현에는 지난 5일부터 3일간 연평균 강수량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1091㎜의 비가 쏟아졌다. 기후(岐阜)현도 같은 기간에 1000㎜ 넘는 비가 내렸다. 문제는 일본 기상청이 이번 초대형 폭우를 미리 예보했다는 점이다. 기상청은 지난 5일 서(西)일본에 폭우가 내릴 것으로 보고 십수년에 한 번 발령될까 말까 하는 '대우(大雨) 특별경보'를 교토(京都)·나가사키(長崎)를 포함한 11개 부현(府縣)에 단계적으로 발령했다.

그러나 중앙정부와 해당 지자체에서 그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저 기계적으로 인터넷이나 지역 방송을 통해 알리는 데 그쳤고 시민들도 방심했다. 이번에 가장 피해가 컸던 히로시마(廣島)현의 히가시히로시마시의 경우 피난 지시가 내려졌지만 대피한 이들은 전체의 1%에 불과했다. 오히려 집에 있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하거나 무시한 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중앙정부에서는 경보를 발령했다는 이유로 할 일을 다 했다는 분위기였고, 행정력이 부족한 지자체는 '설마'하며 방심한 것이 사태를 키웠다.

일본 지역별 폭우 인명 피해 현황

일본은 '매뉴얼 강국'이지만 폭우에 대한 기준이 미흡했던 점도 드러나고 있다. 특히 강제적인 피난 지시를 어떤 기준으로 하느냐가 명확하지 않았다. 특별경보는 기상청에서 발령하지만, 피난 지시는 말단 지자체에서 하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이 11일 "기상청의 방재 기상 정보와 지방자치단체의 대피 정보 간의 협력 체제를 포함해 확실히 검증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것이 이번 사태의 원인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망자 중에는 노인들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했다. 고령화는 재해에서도 참사를 키우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지역 단위 중 가장 피해가 큰 곳은 오카야마(岡山)현 구라시키(倉敷)시의 마비초(眞備町)다. 이곳에서는 4600가구가 침수돼 지금까지 확인된 사망자가 46명이었다. 이 중 70세 이상의 고령자가 80%라고 요미우리신문이 보도했다. 이들은 대부분 집안에서 익사(溺死)한 시체로 발견됐다. 특별경보가 발령됐지만 활동성이 떨어지는 노인들은 대피하기보다 '어떻게든 집에서 견뎌보자'는 식으로 대응한 경우가 많았다. 67명의 사망자가 나온 히로시마현에서는 사망자 절반이 토사(土砂)에 매몰돼 사망했다. 검시(檢屍)가 완료된 34명 중 18명의 사인이 질식사로 밝혀지기도 했다. 토사가 몰려들면서 대부분 산 채로 묻혀버린 것이다.

일본 정부가 인프라 정비에 미흡했던 것도 드러나고 있다. 현재까지 가장 많은 사인(死因)은 강물 범람(氾濫)으로 인한 침수와 토사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번 폭우로 인프라에 대한 대책 마련과 예산 편성이 시급하다고 분석했다.

폭우 사태로 일본에서 안전지대가 사라졌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총 56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오카야마현은 그동안 지진과 수재에 비교적 안전한 지역으로 꼽혔다. 큰 지진이 난 적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을 겪은 사람 중 일부가 이 지역으로 이사하기도 했지만 이번에 히로시마현 다음으로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동일본 대지진 피해 이주자들이 수해 참사의 비극을 맞은 것이다.

일본 정부는 뒤늦게 피해 복구 및 구조 작업에 나서고 있다. 자위대와 경찰 8만여명을 동원해 수해 복구에 나서고 있다고 홍보 중이다. 폭우가 시작된 지난 5일 밤 의원들과 술자리를 가진 사실이 알려져 여론의 호된 비판을 받고 있는 아베 총리는 히로시마현과 오카야마현을 잇달아 방문하며 국민을 달래고 있다. 9월 자민당 총재 3선(選) 연임을 노리는 아베 총리는 수해 피해로 인한 여론이 어디로 향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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