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語西話] 인물은 가도 글씨는 남는다

입력 2018.07.12 03:09

합천 가야산 입구 계곡 암반에는
'조선 인물의 절반'이라 할 만큼 수많은 詩文과 글씨·성명 새겨져

원철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원철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모든 것이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학인 시절에 몇몇이 뜻을 모아 경남 합천군 가야면에 있는 농산정(籠山亭) 정자 인근 절벽에 새겨진 최치원(857~?) 선생의 시문을 탁본하러 갔다. 겨우 발판으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넓이를 가진 바위로 된 비계(飛階) 위에서 조심스럽게 발을 옮겨가며 먹물 묻힌 솜방망이를 두들겼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 탁본한 것은 이미 내 곁을 떠난 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얼마 전 족자로 만든 제시석(題詩石) 탁본을 옛 벗에게 선물로 받았다. 내 땀이 서린 본래 작품이 돌아온 것처럼 기뻤다. 왜냐하면 원판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다실에 걸어놓고 한 줄 한 줄 읽으니 1200년 전 느낌이 그대로 촉(觸)을 따라 전해진다.

합천군 가야산 입구 홍류동 계곡 암반과 석벽에는 많은 시문(詩文)과 글씨, 그리고 다녀간 이들의 성명(姓名)이 새겨져 있다. 돌로 만든 명함이 얼마나 많은지 조선 인물 절반을 모아 두었다고 평할 정도였다. 또 계곡에서 놀던 사람의 이름이 팔만대장경보다 더 많다고도 했다. 이 자리에 이름이 없다면 시인·묵객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라고 할 만큼 서로 경쟁적으로 새긴 탓이다.

2015년 간행된 종현 스님의 계곡답사 자료집 '보장천추(寶藏千秋)'는 "해인사 노승 혹은 사하촌에서 오래 살았던 지역민에 의하면 1970년대까지 암벽을 타고 오르내리며 원하는 위치에 원하는 글자를 새겨주는 것을 부업으로 하던 각수(刻手)들이 있었다"고 했다. 이제는 이름을 새기고 싶어도 새길 수 없는 시절이 됐다. 개인 이름을 보존하는 영광보다 자연환경을 보존해야 한다는 가치가 우선시되는 시대인 까닭이다.

제시석(題詩石)은 최치원 선생이 가야산 계곡에 머물면서 그 심경을 읊은 28자로 된 4행시를 새긴 바위를 말한다. 겹겹이 에워싼 산과 큰 소리를 내며 흐르는 물소리로 인하여 세상일의 시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은둔의 땅 홍류동을 예찬한 글이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김현지

영원히 보존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시를 바위로 된 계곡 바닥에 새겼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거친 물살로 인하여 글씨가 마모됐고 급기야 알아볼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가 건너편 절벽으로 위치를 옮겨 다시 새겼다.

1996년 지관(智冠·1932~2012) 스님은 원본과 사본의 혼동을 막기 위해 이런 전후 사정을 기록한 비석을 원본 곁에 세웠다. 둘 다 최치원의 친필이 아닌 까닭에 모두 복사판이지만 두 차례에 걸쳐 새겨졌다는 사실 자체가 명품임을 알려주는 증거가 되는 셈이다.

돌에 새겨진 글이라 할지라도 몇백 년 물과 바람에 시달리다 보면 글자의 판독에 애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게다가 바탕색과 글자색이 같은지라 요철(凹凸)로만 구별해야 한다. 보호각도 없이 노천에 드러난 글씨는 더 빨리 닳는지라 읽는 것이 더욱 부담스럽다. 판독을 위한 방편으로 먹물과 종이를 이용한 탁본은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하며 시간과 품이 많이 든다. 이뿐만 아니라 부스러져 가는 글씨의 훼손은 물론 원본의 파손까지 재촉하는 반(反)문화적 행위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충북 보은군 속리산 지역의 금석문(金石文·쇠나 돌에 새겨진 글)을 정리하던 철운 스님은 탁본의 한계를 극복한 새로운 방법을 터득했다고 자랑했다. 비결은 밀가루다. 음각된 부분에 채워진 하얀 밀가루 자국으로 쉽고 편하게 글씨를 판독할 수 있었다. 이를 사진으로 찍고 컴퓨터 화면으로 옮겨 확대하면 마모가 심한 글씨는 물론 깨알 같은 글자까지 읽을 수 있다는 나름의 비책을 개발한 것이다. 남아있는 밀가루는 빗자루로 털어내면 간단하게 해결된다.

홍류동 바위에 새겨진 주인공 글씨는 자필도 있지만 대필도 있을 것이다. 자필 혹은 명필의 필체를 따로 준비한 경우가 아니라면 현장에서 즉석으로 새겼던 '석수장이체'도 더러 있을 것이다. 금석문 연구에 적지 않은 공력을 쏟았고 많은 비석글을 남긴 지관 스님도 친필 금석문은 거의 없다. 글을 지은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이 달랐던 까닭이다.

지난 6월 하순 경북 포항시 청하면에 있는 스님의 생가터 보은원(報恩苑)을 찾은 뒤 김해 봉하마을에서 당신의 한문·한글 친필을 동시에 만나게 되었다. 인물은 가도 글씨는 남는 법이다. 이것이 금석문이 가진 포기할 수 없는 치명적 매력 아니겠는가?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