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그래, 내가 나라의 도둑 김옥균을 죽였다"

입력 2018.07.11 03:01

[129] 혁명가 김옥균을 암살한 지식인 홍종우

박종인의 땅의 歷史
1893년 7월 22일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던 조선 사내가 친구와 작별했다. 친구인 동양학자 펠릭스 레가메가 그에게 물었다. "프랑스에서 뭐가 좋았어요?" "마르세유에서 본 말들입니다. 아주 커 보이더군요." "나쁜 것은?" "이기주의요." 이 말을 남기고 사내가 탄 차는 길모퉁이를 돌아갔다. 그는 입에 담배를 물고 잿빛 긴 옷을 입은 채 똑바로 앉아 뒤돌아보지도 않고 떠났다.(펠릭스 레가메, '어떤 정치적 자객', 1894년, 국사편찬위 '한불관계자료')

3년 5개월 체류 기간 내내 상투를 틀고 한복을 입고 다닌 민족주의자였다. '춘향전'과 '심청전'을 최초로 프랑스어로 번역해 유럽에 소개한 사람이었다. 파리 지식인들과 역사와 철학을 토론하던 지식인이었다.

8개월이 지난 1894년 3월 28일 사내는 중국 상해에 나타났다. 묵고 있던 호텔 옆방에 권총을 들고 들어가 실패한 혁명가 김옥균에게 권총 세 발을 쏘았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국적(國賊)을 죽였다." 홍종우(洪鍾宇). '수구파 사주를 받은 암살범'으로 우리들이 기억하고 있는, 한 지식인 이야기.

"민중이 무지하여" 3일 천하

19세기 말 나라 꼬라지는 엉망진창이었고 기성 정치가들에게 개혁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박영효가 훗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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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제주시 용연(龍淵) 출렁다리 입구 쪽 전망대에서 정자 쪽을 유심히 보면 절벽에 한자 '洪' 자가 얼핏 보인다. '洪鍾宇'라 새겨진 글자다. 최초의 파리 유학생, 김옥균 암살범, 개혁을 주장한 관료 홍종우가 남긴 흔적이다. /박종인 기자
'나는 21세 청년이요 서광범은 한 살 많고 김옥균은 10년 위였다. 항상 합심 동력하여 시기가 오기를 기다렸더니 마침 그다음 해(1882년) 일본에 사절을 보내게 되었으므로 우리는 좋은 기회가 왔다 하여 자원하였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대개혁을 단행하던 때라 국운은 날로 융성하여 가는 판이었다. 3개월을 머무르는 동안 이 성황을 보니 부럽기 천만이라. "우리나라는 언제나…" 하는 초급한 마음이 일어나는 동시에 개혁의 웅심을 참으려 하여도 참을 수가 없었다. 훗날 개혁의 헛된 희생만 되고 만 것도 이 충동으로 인하여 빚어진 일이다.'('新民' 1926년 6월호 순종 인산 기념 특집호 '순종실기')

'참으려 하여도 참을 수가 없던' 청년들이 벌인 사건이 갑신정변이었다. 준비가 없는 쿠데타였다. 그래서 '여론도 없고 정당이 없고 병력이 없기에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를 주륙하는 비상 수단을 썼다.'(박영효, '순종실기') 혁명 동지였던 서재필은 이렇게 말했다. '제일 큰 패인은 그 계획에 까닭도 모르고 반대하는 일반 민중의 무지몰각(無知沒覺)이었다.'(서재필, 동아일보 1935년 1월 2일 '회고 갑신정변')

용연 절벽에 새겨진 홍종우 마애명.
용연 절벽에 새겨진 홍종우 마애명. 왼쪽에는‘광무 갑진 4월’(1904년 4월)이라 새겨져 있다.
박영효 회고는 객관적이다. 서재필은 계몽적이고 오만하다. 옳은 일을 하는데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몰라줘서 실패했다는 것이다. 갑신정변이 사흘 만에 실패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어찌 되었든, 성공하면 혁명이요 실패하면 반란이다. 반란 패적들은 처형당하거나 망명을 떠났다. 일본으로 간 박영효와 김옥균은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박영효는 귀국해 친일파로 변신했다. 김옥균은 암살됐다. 홍종우가 죽였다.

첫 프랑스 유학생

조선을 프랑스에 처음 소개한 조선인은 1890년 프랑스로 떠난 유학생 홍종우였다.(이경해, '파리외방전교회와 조선의 만남', 2011년)

홍종우는 1850년 음력 11월 17일생이다. 세도정치의 권세를 누린 남양 홍씨 남양군파다. 경기도 안산이 고향이지만 홍종우 가족은 땅끝 전남 완도 고금도에 살았다.(황현, '매천야록') 아버지가 관직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젊은 시절 기록은 없다. 홍종우는 서른여섯 살이 되던 1886년 3월 어머니 경주 김씨가 죽자 프랑스로 떠날 계획을 세웠다. 2년 뒤 도쿄에 도착한 홍종우는 2년 동안 프랑스행 여비를 벌었다. 오사카에서는 아사히신문사 식자공으로 일했고 규슈에서는 휘호를 팔아 돈을 벌기도 했다.

그리고 1890년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만난 화가이자 동양학자 펠릭스 레가메는 그를 이렇게 평했다. '홍종우는 커다란 호랑이가 나에게 주었던 감탄이 섞여 있는 비밀스러운 공포를 주었다. 그는 자국 이익을 위해 유럽 문명을 이해하기를 갈망했다. 러시아와 미국에 흩어져 있는 젊은 동지들과 함께 기획을 했다. 조선을 압박하는 중국, 일본과 러시아로부터의 완전한 독립, 그리고 세계로부터 조선을 격리하는 장벽의 철폐다.'(레가메, '어떤 정치적 자객') 근대 유럽을 배워 나라를 고치겠다는 열정이 호랑이처럼 불타는 사내였다.

레가메 소개로 홍종우는 파리 사교계에 데뷔했다. '조선 상황은 위태롭다. 유럽 문명 수용만이 구제될 수 있는 길이다. 일본에서 정치를 깊이 연구했다. 그런 믿음을 확인시켜줬다.'(1891년 2월 '여행자 모임 연설' 중) 늘 한복을 입고 정자관을 쓰고 고종과 흥선대원군 사진을 품고 다니는 이 기이한 사내는 사교계에 틈만 나면 그렇게 말하곤 했다.

홍종우는 동양학 전문 기메박물관에 일자리를 얻었다. 외국인 조력자(collaborateur étranger) 신분으로 한국어와 일본어, 중국어 자료를 번역했다. 기메박물관 한국관 설립도 그가 관여했다. 그 과정에서 '춘향전'을 번역하고 '심청전'을 프랑스 학자와 공동 번역했다. 조선 문학이 유럽에 최초로 소개된 사례였다. '봄날의 향기(Printemps Parfumé)'로 번역된 춘향전은 1936년 러시아 발레 안무가 미하일 포킨이 '사랑의 시련(L'Epreuve d'Amour)' 제목 발레극으로 각색했다. 춘향전과 심청전을 합친 소설 '고춘목(枯春木, Le bois sec réfleuri)', 조선 점성술 서적 '점성과 운수에 관한 안내서'도 썼다.(국사편찬위원회 '재외동포사 총서 2' 해방 이전 한불간 교류)

1894년 6월 24일 프랑스‘르몽드 일뤼스트레’에 실린 홍종우 기사.
1894년 6월 24일 프랑스‘르몽드 일뤼스트레’에 실린 홍종우 기사. 제목은‘어떤 정치적 자객(Un Assassin Politique)’이다.
1893년 7월 홍종우가 귀국했다. '르 피가로(Le Figaro)'가 쓴 평가는 '헌신적이고 숭고한 영혼의 애국주의자'였다. 기메박물관 한국관 설립은 무기 연기됐다.(신상철, '19세기 프랑스 박물관에서의 한국미술 전시 역사', 2013년)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프랑스는) 이기주의요'였다. 그런 그가 암살자가 된 것이다.

암살범 홍종우

홍종우가 유학을 다녀온 직후였다. 귀국길에 체류한 도쿄에서 박영효 암살 미수범 이일직(駐韓日本公使館記錄 2권)을 만나 김옥균 제거 계획에 동참한 것이다.(조재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그가 직접 말한 이유는 세 가지였다.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였고, 왕을 선동해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으며, 외국 군대를 끌고 궁중에 들어갔다.('일본외교문서 27권', 조재곤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재인용)

그가 돌아오자 갑신정변 희생자 가족들이 거듭 잔치에 그를 초대했다. 그가 말했다. "개인의 적을 토멸한 게 아니라 동양 전국의 어려운 단계를 헤쳐나갈 수 없게 할 우려가 있기에 죽였다."('일본외교문서 5권', 조재곤 재인용)

충남 아산시에 있는 김옥균 유허.
충남 아산시에 있는 김옥균 유허. 참시(斬屍)를 당한 김옥균 사체는 팔도에 버려졌다. 이 유허에는 김옥균의 머리카락과 옷가지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김옥균 암살 석 달 뒤 청일전쟁이 터졌다. 동학혁명이 벌어지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원병을 청한 사람은 민영준이다. 훗날 민영휘로 이름을 바꾸고 친일파가 된 자다. 그에게 홍종우가 찾아가 조용히 말했다. "이번에 대감께서 청국에 원병을 청하신 것은 큰 실수입니다. 청군이 남하하면 몹시 피폐해질 것입니다. 또한 일본이 이 기회를 타서 군대를 내보낸다면 국가의 안위가 달릴 것이니, 장래 일을 미리 내다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민씨는 얼굴빛이 잿빛으로 변해 단지 '그래, 그래'라고만 했다고 한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 '일청 양국군 내방에 따른 국내외 탐정 보고', 1894년 6월 12일)

이승만을 살려준 재판장

홍종우는 1895년 음력 4월 21일 과거시험에 응시해 진사에 급제했다. 사람들은 홍종우를 뽑기 위해 만든 시험이라고 수군대며 종우과(鍾宇科)라 불렀다.(황현, '매천야록') 홍종우는 11회 상소를 올리며 근대화를 주장했다. 외세 의존 없는 근대화가 그가 꿈꾸는 이상이었다.

1899년 독립협회와 관련된 사건으로 이승만이 체포됐다. 반란 및 탈옥 혐의로 태(笞) 100대와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형 집행장에 판사가 들어왔다 나갔다. 간수가 몽둥이를 들었다 놨다 했는데 내 몸에는 아무 상처가 나지 않았다.'(이승만, '청년 이승만 자서전', 조재곤 재인용) 그때 재판장이 홍종우였다. 이승만은 '정적 홍종우가 내 생명을 구해주기로 했다는 말을 퍽 후에 들었다'고 했다.

1903년 홍종우는 제주 목사로 좌천됐다. 제주 주민을 상대로 폭력을 휘두르던 프랑스계 가톨릭 집단에 항거한 이재수의 난을 무마했다. 지금 제주도에 있는 황사평(黃沙平) 가톨릭성지는 그때 홍종우가 천주교도 매장지로 마련해준 땅이다. 홍종우는 제주에서 좋은 경치를 돌아다니며 이름을 새겨넣었다. 용담동 용연 절벽에 있는 그의 이름 석 자도 그중 하나다. 천지연폭포, 산방굴사와 방선문 계곡에도 그 이름이 남아 있다. 이후 행적은 끊겼다. 2003년판 남양 홍씨 남양군파 세보에 따르면 홍종우는 1913년 음력 1월 2일 죽었다. 아들 둘과 출가한 딸이 둘 있었다. 묘는 경기도 고양 아현리에 썼다. 지금 서울 만리동이다. 만리동 공동묘지는 일제 때 사라졌다. 그 묘도 사라졌다. 흔적은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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