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郡 경찰관들, 권총·테이저건 들고도 흉기에 찔려
최근 5년 범인 흉기 등에 2540여명 부상, 순직도 3명
경찰 내부 "까다로운 규정, 복잡한 사후처리가 문제"

“테이저건이나 권총이 있으면 뭘 합니까. 잘못 당기면 경위서에 뭐에, 뒤처리만 복잡해집니다. 우리에게 총은 무거운 쇳덩어리일 뿐입니다.”

10일 오전 10시쯤 서울 시내 한 경찰서. 지난 8일 경북 영양군에서 주민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목숨을 잃은 고(故) 김선현(51) 경감의 영결식을 TV로 보고 있던 한 형사가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묵념(默念)을 마친 그는 “남의 일 같지 않다. 현장에서 근무하는 10만 경찰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그는 “제때 무기로 경계(警戒)만 했어도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었을 텐데...”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날 전국 경찰서에는 조기(弔旗)가 걸렸다. 경찰관들은 가슴에 ‘근조 리본’을 달았다.

주택가에서 난동을 부리던 주민을 말리다 흉기에 찔려 순직한 고 김선현 경감 영결식이 10일 오전 경북 영양군민회관에서 열렸다. 동료들이 운구 행렬을 지켜보며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다.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최근 5년 동안 직무집행 과정에서 범인의 피습으로 순직한 경찰관은 3명, 범인과의 격투 등을 벌이다가 부상해 공상 처리된 경찰관은 2541명이다. 일선 경찰관들은 "복잡하고 까다로운 규정 때문에 경찰관 무기는 있어도 쓰지 못 하는 무용지물"이라고 입을 모았다.
흉기를 휘두르며 목숨을 위협하는데도 김 경감이 총 한 번 빼 들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총과 테이저건 들고 출동했지만… 5분 만에 벌어진 참극
"아들이 살림살이를 부수며 소란을 피운다"는 백모(42)씨 어머니의 신고 전화가 걸려왔다.
김 경감은 오모 경위(53)와 함께 규정대로 2인 1조로 움직였다. 김 경감은 38구경 권총을, 오 경위는 테이저건을 각각 착용했다. 다만 흉기를 들었다는 신고가 아니었기 때문에 김 경감 등은 칼을 막는 방검복은 입지 않았다.

지난 8일 오후 난동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주민이 휘두른 흉기에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 경북 영양군 영양읍 동부리 현장 모습.

현장에 4분 만에 도착한 김 경감은 현장 출동 5분 만에 변을 당했다. 했다. 백씨는 유리창과 화분 등을 깬 상태였고, 흥분한 채 서성거리고 있었다. 김 경감 등이 백씨를 달래며 말을 걸자 백씨는 집 뒤편으로 뛰어가 11㎝ 정도 되는 흉기를 들고나와 달려들었다.

서울 모 경찰서 수사과장은 “당시 상황을 보면 무기로 제압하기보다는 대화로 설득하거나 구두로 경고하는 게 더 적절한 조치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강력팀 형사는 “무기 사용 등 판단과 대응을 하기 어려울 만큼 시간이 짧았고,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간 것 같다”면서 “하지만 유리창을 깨고 화분을 던지며 난동을 부릴 때부터 총이나 무기를 꺼내 경계를 했다면 이런 변을 당하지는 않을 수 있었다”고 했다.

◇"격발하면 패가망신하는데..." 무기대응 강화 필요
범인 검거 등을 위해 현장에 출동하는 경찰관들은 하나같이 "위험하다고 무조건 총기를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했다. 경찰관 사이에서는 "총 한 번 잘못 쏘면 패가망신한다", "총은 쏘는 게 아니다. 던지는 거다", "총=감사실" 같은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한 경찰관이 테이저건 사용법에 대해 설명하며, 총을 겨누고 있다. 테이저건은 전극 침을 발사해 순간적으로 5만 볼트의 고압전류를 흘려 근육을 마비시킬 수 있다.

지구대 근무 경험이 있는 한 경찰관은 “총기를 사용하면 경위서, 무기사용 신고서 등 여러 서류를 써서 상부에 보고해야 하고, 조금만 규정을 벗어나도 감사를 받기 일쑤”라며 “총을 잘못 쏴 범인이 아닌 사람이 다쳐 몇 년간 민사소송 등에 시달리는 경우도 봤다. 대부분 총은 안 쓰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범인을 체포하다가 소송에 휘말린 경우 대다수 경찰들은 사비(私費)로 문제를 해결한다. 실제 작년 8월 서울 연신내지구대 소속 순경은 만취자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전치 5주의 부상을 입혀 5300만원을 개인적으로 물어줬다.

치안정책연구소가 경찰관의 물리력 행사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결과, 피의자가 깨진 유리병을 들고 저항할 때 어떻게 대처할지 묻는 질문에 권총을 발사하겠다는 응답자는 전체 응답자의 16%에 불과했다. 가장 많은 응답이 나온 35.8%는 ‘무전으로 지원을 요청한 후 지원이 올 때까지 현 상태를 유지하겠다’는 것이었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복잡한 장비사용 규정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다. 현행 경찰관 직무집행법과 경찰 총기 사용 매뉴얼을 보면 경찰 장비는 △현행범과 맞닥뜨렸을 때 △사형·무기 또는 장기 3년 이상 징역·금고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범인의 도주를 방지할 때 등 긴급한 상황일 때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 실제 발사를 할 때도 △구두 경고와 함께 공포탄 1발을 미리 발사한 뒤 실탄을 쏠 것, 생명에 지장이 없는 허벅지를 쏠 것 등의 규정도 있다. 실제 사격연습 시 허벅지는 5점, 허리 2점, 머리나 가슴을 쏘면 0점이다.

경찰관들이 사격연습을 한 뒤 표적 판을 확인하는 모습. 경찰은 총기 사용 시 얼굴이나 가슴이 아닌 하반신에 사격하도록 교육 훈련을 받고 있다.

특히 테이저건 등 위해성 장비의 경우 △상대방 얼굴을 겨냥해서는 안 되고, △14세 미만 청소년·임산부에게 사용금지 등 제한 규정도 두고 있다.

이훈 조선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잘 사용하지 않는 총기의 경우 정기적으로 훈련과 연습을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 자주 사용하게 되는 테이저건이나 삼단봉 등에 대해서는 현재 제대로 된 교육 방법도 없다”고 했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급박한 대치 상황에서 각종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지를 판단하면서, 동시에 대퇴부 이하를 정확히 맞혀 범죄자를 제압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경찰관이 총을 빼 드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다 보니 (경찰관들이) 총기 사용을 피할 수밖에 없다. 제도나 규정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했다.

◇"총기 사용 어려우면 '방검복'이라도 의무화해야"
김 경감과 오 경위가 방검복을 입지 않은 채 출동한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그러나 현재 경찰 내부 규정에는 '방검복 착용'이 선택사항으로 돼 있다. 단순 기물 파손 등의 신고가 들어올 때는 누구나 방검복을 착용하지 않고 나간다는 게 경찰관들의 이야기다.

방검복은 흉기 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입는 일종의 방탄조끼다. 조끼 속에 특수철강재를 넣어 제작하기 때문에 1개당 무게가 3kg이나 돼 움직임이 불편하다고 한다. 특히 이번에 변을 당한 김 경감처럼 목 부위를 겨냥했을 때는 보호할 방법이 없다.

광주지방경찰청의 한 관계자는 “무기 사용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방검복이라도 성능 좋고, 실용성 있게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대구 모 경찰서 형사과장은 “항상 위험에 노출돼 있는 경찰관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방검복 착용 등을 의무화해야 한다”면서 “무기 사용이나 방검복 착용 등을 모두 꺼리는 상황이다 보니 경찰청 차원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