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고교 때부터 구상한 작품… 오랜 꿈 이뤄"

조선일보
  • 송혜진 기자
    입력 2018.07.06 03:01

    ['마녀' 감독 박훈정]

    개봉 6일 만에 100만 관객 돌파

    ['마녀' 감독 박훈정]
    박훈정 감독은 영화 개봉 무렵엔 관련 리뷰나 기사도 보지 않는다고 했다. “부담되고 떨려서요(웃음).” 그는 “이 인터뷰 기사도 개봉 한 달쯤 지나면 읽어보겠다”고 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1980년대 말 비디오 대여점 맨 아래칸 구석에 처박힌 마지막 테이프 한 점까지 모조리 봐야 직성이 풀리는 고등학생이 있었다. 홍콩 누아르 영화부터 할리우드 영화, 유럽 예술 영화까지 남김없이 봤다. 일본 애니메이션에도 열광했다. 일본 만화나 영화가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던 시절 서울 명동 지하상가를 오가며 각종 해적판을 구해봤고, 그러고도 못 구한 비디오테이프는 전국 비디오 가게 총판 업체에 연락을 돌려가며 수소문을 했다. 부산이나 대구까지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가 '딱 하나밖에 없는' 비디오테이프를 손에 넣은 날엔 너무 설레고 흥분돼 심장이 아플 지경이었다.

    이 고등학생이 지금의 박훈정(44) 감독이다. 영화 '신세계'(2013년) '대호'(2015년) '브이아이피'(2017년)를 연출했고, '악마를 보았다'(2010년)와 '부당거래'(2010년)의 시나리오를 쓴 주인공이다. 피투성이 액션, 음모와 비리가 숨은 암울한 세계를 주로 그려왔다. 지난달 27일엔 새 영화 '마녀'를 내놓았다. 신인 배우 김다미가 원톱으로 나오는 액션 영화다. 기존에 그렸던 피범벅의 세계를 넘어 이번 영화에선 SF와 히어로물까지 결합해 결이 다른 잔혹함을 그린다. 개봉하자마자 예매율 1위를 기록, 6일 만에 누적 관객 100만명을 넘겼다.

    지난달 말 서울 삼청동에서 박훈정 감독에게 "왜 그토록 잔혹한 세상에 집착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어린 시절 얘기를 대신 들려줬다. "6~7세 무렵부터 별의별 책을 읽었어요. 북유럽·남미 동화까지 구해 읽었고, 초등학교 4학년 무렵부턴 문학 작품과 무협지를 읽었죠. 동화에서 문학 작품과 무협지로 넘어가면서 뭐랄까…, 배신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동화 같은 결말은 동화에만 있다는 걸 너무 빨리 깨달은 거죠. 이후론 영화에 탐닉했고요."

    ['마녀' 감독 박훈정]
    박훈정 감독이 연출한 영화. 왼쪽부터 신세계, 브이아이피, 마녀.
    여러모로 남다른 '덕후'였다. 영화를 보고 나면 그 영화를 다시 시나리오로 써보곤 했다. 시나리오 작법을 따로 배웠을 리 없다. 서울 동숭동 영화 서적 전문 서점에 드나들며 영화진흥위원회가 발간한 '한국 영화 시나리오 전집'을 달달 외울 정도로 읽었다. 남의 영화를 보고 거꾸로 시나리오를 필사하던 것이 쌓이자 나중엔 창작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 이 무렵엔 동양철학 서적도 읽었다. 장자의 '제물론'과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늘리지 말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라는 구절에 특히 열광했다. 박훈정은 "나만의 개똥철학이 이때 정립됐다"며 웃었다. "모든 전쟁은 인간이 서로를 내버려두지 못하고 간섭하면서 생기는 것이더라고요. 그런 세상을 한발 뒤에 서서 관찰하고 싶어졌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대학은 대충 성적에 맞춰 자연계 학과로 진학했다. 휴학하고 군대에 갔는데 뜻밖에도 적성에 맞았다. 부사관에 지원했고 중사로 제대했다. 대학은 결국 졸업하지 못했다. 제대하고는 게임 회사에 취직해 게임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한 시놉시스 공모전에 당선되면서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됐고 이후 감독이 됐다. 처음부터 흥행작을 내놓았던 것은 아니다. 2011년 데뷔작인 영화 '혈투'는 "대차게 말아먹었다". 그런데도 그에게 이후 연출 제의가 계속 들어왔고 거듭 히트작을 냈다. 박훈정은 "덕후로 살아온 덕에 감독을 하고 있다. 이만하면 행운아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마녀'는 '원조 덕후' 박훈정이 고등학교 때부터 구상했던 작품이다. 뇌를 100% 쓸 줄 아는 남다른 유전자를 지닌 여성이 그를 공격하는 세상과 싸우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주인공을 누구에게 맡길까 고민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신인을 써야겠다 싶었다. 문제는 제작비였다. 여성 배우가 원톱인 액션 영화인데 심지어 신인 배우가 주인공이라는 얘기에 투자자들은 난색을 표했다. 그렇게 차일피일 제작이 미뤄졌던 것이 올해 완성된 것이다. 1200대1 경쟁을 뚫고 뽑힌 김다미가 영화 속에서 박훈정의 손발처럼 움직인다. 박훈정 감독은 "완성된 영화를 보면서 오랜 꿈이 하나 이뤄진 기분이기도 했다"고 했다. "제가 열광했던 모든 대중문화 요소가 녹아 있어요. 누군가는 베꼈다고 할 테고 누군가는 오마주라고 하겠으나 저는 이를 통해 새 창작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마녀'는 애초부터 시리즈물로 기획됐다. 박훈정은 "캐릭터가 굴러가는 대로 다음 이야기를 짜볼 생각"이라고 했다. "비디오 키드의 꿈이 현실이 되는 과정 같기도 해서 즐겁습니다." 덕후 소년은 여전히 성(城)을 쌓고 있었다.

    [박훈정 프로필]

    2010년 영화 '악마를 보았다' 각본

    2010년 영화 '부당거래' 각본

    2011년 몬트리올 판타지아 영화제 각본상, 청룡영화상 각본상 수상

    2011년 영화 '혈투' 각본·연출

    2013년 영화 '신세계' 각본·연출

    2015년 영화 '대호' 각본·연출

    2017년 영화 '브이아이피' 각본·연출

    2018년 영화 '마녀' 각본·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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