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우철의 스틸라이프] “이거 하나 샀다고 안죽지, 안죽어” 여행자의 전리품

  • 장우철 사진작가
    입력 2018.07.10 06:00

    예뻐서 산 책, 유리꽃병, 장난감, 하귤…
    여행지에서 이것저것 사 모으는 하찮고 커다란 기쁨
    ‘현지인 컨셉’은 사양, 여행지에선 이방인으로 살아야 제맛

    ’하귤의 계절’. 하겐다즈 하귤맛, 최경주 작가의 오브제, 채소를 찍은 책, 하귤잼./장우철
    여행은 일상의 반대말. 사놓고 왠지 입지 못한 옷이 있다면 ‘이번에 도쿄 가서 입어야지’ 슬쩍 마음먹을 수 있고, 싫어한다며 입에 대지 않던 식재료는 ‘이번에 방콕 가면 꼭 고수를 길들이겠어’ 할 수 있다. 그런 이치로 내가 여행지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은, 호텔로 돌아와 정돈된 침대 위에 하루 치 가방을 탈탈 터는 시간이다.

    서로 다른 속도로 우당탕 흰 시트 위에 쏟아지는 것들을 볼 때, 그렇게도 일상과는 달랐던 하루에 그만 뿌듯해지고 만다. 표지가 예뻐서 내용을 모르고도 산 책, 별의별 영수증, 명함과 팸플릿, 익숙하지 않은 동전들, 어떤 때는 과일도 한두 개, 기념품이라며 사들인 별 쓸모없이 자디잔 것들, 돌멩이도 가끔... 소비에 후회를 줄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지혜로운 일이지만, 이건 뭐하러 샀나, 여행지에선 후회마저 달콤하다. 되려 ‘이거 하나 샀다고 안 죽지, 안 죽어’ 과감한 미소가 생긴다. 여행의 마법이랄까.

    ◇ 하루 치 가방을 탈탈 터는 시간

    지금 나는 도쿄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좁은 호텔 방 침대 한쪽에는 어젯밤 쏟아놓은 것들이 뒤엉켜 있다. (이 옆에서 잠들었다니 마치 부장품 같군.) 나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다시 보기 시작한다.

    마츠다 세이코가 표지인 잡지에 나카모리 아키나의 대형 사진이 들어있는 1983년의 잡지./장우철
    어젯밤 10시, 마감을 30분 앞둔 츠타야 긴자식스점에서 나는 다이도 모리야마의 사진집을 살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을 아무 글자도 없이 표지로 만든 얇은 책이었는데, 값이 10만원이었다. 그것을 사도록 결정한 것은 뜬금없이 ‘샤쿠란보’였다. 요즘 제철을 맞아 일본의 과일 코너 어디에서든 그 뾰루퉁 귀여운 표정을 볼 수 있는 체리의 한 종류. 나는 샤쿠란보 두 알을 이 책 위에 놓고 이번 도쿄 여행 기념사진을 찍어야지 생각하는 순간, 다른 모든 걸 잊고 말았다.

    마츠다 세이코가 표지를 장식한 책은 잡지 ‘Goro’에서 1983년에 별책부록으로 낸 것이다. 츠타야에는 섹션의 성격에 어울리는 ‘헌책’도 함께 놓여있는데, 시노야마 기신의 사진집이 나란한 서가에 이것도 있었다. 더구나 표지에서 ‘中森明菜(나카모리 아키나) BIG PIN-UP’이라는 글자를 확인한 순간, 나는 보물을 찾은 해적과 같은 마음이 되었다. 80년대 일본의 가장 상징적인 아이돌 두 사람이 함께 들어간 책이라니, 마츠다 세이코가 표지인데 나카모리 아키나의 대형 사진이 들어있고, 사진은 시노야마 기신이라고? 횡재다, 횡재. 서울로 돌아가 이 책을 창가에 두고 그 옆에 봉숭아꽃을 잠시 놓는 상상을 한다.

    빅끄 카메라(Big Camera)에서 나눠준 공짜부채와 전통의 장난감 성지 하쿠힌칸(博品博品館)토이파크에서 산 반짝이는 장난감./장우철
    하귤, 일본어로 아마나츠(甘夏)는 요즘 들어 가장 좋아하는 ‘피사체’인데, 어쩌다 보니 무슨 테마처럼 몇 가지를 사들였다. 세계의 채소들을 고요하도록 담은 책, 도쿄 북쪽의 소도시 우에다에서 산 여름귤 잼 한 병, 마침 나온 하겐다즈 하귤맛 아이스크림, 그리고 서울에서 가져간 아티스트 최경주의 오브제 작업 한 점을 함께 놓고 하루의 눈과 마음을 쉰다.

    ◇ 철저히 이방인으로 있다 올테야…

    긴자의 한 꽃집에서 산 갖가지 야생화와 유리꽃병./장우철
    여행지에 도착해 내가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꽃을 사는 것이다. 호텔 방이 미치도록 아름답든, 예상보다 더 후졌든 그 방에 꽃을 꽂으면 전혀 다른 생기가 난다. 야생초목을 전문으로 다루는 긴자의 꽃집에서 눈에 보이는 대로 골랐더니 생수병(여행지에서 가장 좋은 꽃병) 주둥이가 좁을 만큼이기에, 그걸 핑계 삼아 어여쁜 꽃병을 샀다. 꽃값의 열 배쯤 되는 유리 꽃병. 이런 웃기는 소비라니. 하지만 웃겨서 웃고, 좋아서 또 웃는다. 이것도 여행이 부리는 마법이다.

    일본 편의점 털기. 해도 해도 질리지 않는 재미나는 이벤트. 며칠째 가마니로 털고 있는데 여름 하(夏)자를 대문짝만하게 쓴 이 감자칩을 몇 개째 산다. ‘제철’이라는 말·콘셉트를 과일이나 해산물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디자인하고 마케팅할 수 있다. 같은 제품이라도 ‘기간한정’이라며 특별 버전을 내서 늘 신선함을 준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친구들에게 지난 여름의 선물이라며 나눠줄 생각에 나는 이걸 열 봉지쯤 사갈까 한다.

    편의점 털기도 빠질 수 없다. 칼비에서 나온 기간 한정 감자칩./장우철
    현지인처럼 먹고 현지인처럼 입고 현지인처럼 살다 오는 여행, 요즘 이런 얘기 참 많은데, 나는 그 ‘콘셉트’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실은 어깃장이라도 놓듯이 ‘철저히 이방인으로서 있다가 올 테야’ 다짐하는 것이다. 잠시 머무는 사람, 잠시 들여다보고, 잠시 새로워지며, 잠시 꿈꾸는 사람이기를, 나는 솔직하도록 그런 여행자이기를 바랐다. 그러는 와중 침대 위에 털어놓은 하루의 ‘전리품’들을 보면서 들큰한 한숨을 쉰다.

    ◆장우철은 한 잡지의 에디터로 15년을 보내다 한여름에 그만두고는 이런저런 일을 한다. 요새는 ‘DAZED KOREA’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HOUSE VISION SEOUL’의 에디터, ‘샌프란시스코마켓’의 라이터(이상 수입 순), 사진가 등으로 불리며 글쓰고, 사진 찍고, 인터뷰하고, 기획하고, 진행하고 그런다. 또한 해마다 초겨울이면 엄마가 짠 참기름과 들기름을 파는 기름장수가 되기도 한다. ‘여기와 거기’, ‘좋아서 웃었다’ 두 권의 책을 냈다. 몇 번인가 전시를 열었고, 서울과 논산을 오가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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