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찌에도 영감 준 民畵, 세계서 꽃피울까

조선일보
  • 변희원 기자
    입력 2018.07.05 03:00

    8첩 병풍부터 '연화모란도'까지 꽃 주제로 한 그림·자수 60여 점
    내달 19일까지 '민화, 현대를…'展

    천지에 어둠이 깔린 밤의 정원. 연홍색과 심홍색의 모란꽃이 만개한 가운데 앵무새 암수 한 쌍이 마주 보고 앉았다. 괴석(怪石)에 꽃처럼 피어난 푸른 이끼가 형형하게 빛난다. 낮이든 밤이든, 이 그림 걸린 방에서라면 시간을 잊고 한 쌍의 새처럼 사랑을 나눌 터.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과 괴석이 든든히 떠받치고 있으니 이보다 축복받은 사랑이 있을까.

    17~18세기에 그려진 8첩 병풍 중 한 첩이다. 검은 바탕이 깔린 여덟 첩마다 각기 다른 꽃과 새가 그려져 있다.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갤러리현대·두가헌갤러리에서 열리는 '민화, 현대를 만나다: 조선시대 꽃그림'전에서 볼 수 있다. 주로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의 민화 중 꽃을 주제로 한 그림과 자수 60여 점을 선보인다. 꽃과 새가 함께 나오는 '화조도(花鳥圖)', 사계절 꽃이 가득 핀 '화초병(花草屛)', 꽃과 털 있는 동물이 함께 어울린 '화초영모병(花草翎毛屛)'등 꽃이 등장하는 민화들을 모은 뒤 엄선했다. 지난 2년간 박물관, 미술관뿐 아니라 국내외 개인 소장자들에게 작품을 빌려왔다.

    일본민예관을 설립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소장품 '연화모란도'도 한 점 출품됐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속화(俗畵)'라고 불리던 채색화에 '민화'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래도 민화라는 어감 때문에 '비전문가가 그린 그림'으로 여겨졌다. 수준이 낮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번 전시엔 자유로운 구성을 갖추면서도 정교하고 세련된 민화들을 여럿 발견할 수 있다. '민화는 소박하다'는 생각도 12첩 병풍으로 이뤄진 '연화도'를 본 뒤엔 달라진다. 한 첩당 세로 132㎝·가로 42㎝로, 다 펼치면 폭이 5m가 넘는다. 여느 고관대작의 집이 아니고선 펼쳐놓기 힘든 크기다. 정병모 경주대 문화재학과 교수는 "민화에 등장한 꽃들은 조형적 아름다움을 갖고 있으며 이는 패턴으로도 볼 수 있다"며 "여기에서 현대 디자인의 방향을 모색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꽃은 동서고금을 넘어 그림에 흔히 등장하는 소재이지만, 민화에선 식상하지 않게 그려졌다. 꽃이 실제보다 더 크고 더 붉게 표현됐다. 일부 작품에선 무슨 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왜곡됐다. 일본 소장자가 갖고 있는 8첩 중 단 한 첩만 대여해 올 수 있었던 화조화의 꽃은 현대 작가가 그렸다 해도 믿을 만큼 추상적이다. 꽃잎은 크고 단순하지만 꽃받침은 세밀히 묘사됐다. 줄기엔 꽃보다 훨씬 작은 새가 앉아 있다. 일본에 있는 우리 화조화 가운데 최고 명품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민화는 최근 세계 미술계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이 전시에 나온 작품들은 책거리 민화와 함께 오는 10월 런던 아트페어 '프리즈 마스터스(Frieze Masters)'에서 전시할 예정이다. 2016년에 갤러리현대와 서울 예술의전당이 공동 주최한 '조선 궁중화·민화 걸작전'은 미국 뉴욕 찰스왕센터, 캔자스 스펜서 미술관, 클리블랜드 미술관에서 순회전을 이어갔다. 이탈리아 브랜드 구찌는 2018년 봄·여름 컬렉션에 등장한 새가 "한국의 민화(화조도)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화조도나 모란괴석도나 꽃이 등장한 민화는 사랑으로 행복한 가정을 꾸려 부귀영화를 누리길 기원한다. 19세기를 지나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판타지다. 현실과 환상, 삶과 꿈을 간단없이 오가는 전시다. 8월 19일까지, 입장료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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