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기내식(機內食)

조선일보
  • 이진석 논설위원
    입력 2018.07.04 03:16 | 수정 2018.07.04 03:48

    돌아가신 할머니가 20여년 전 태국 여행을 다녀오신 뒤 하신 말씀이 이랬다. "기내식(機內食) 그거 못 먹겠더라." 연신 타박을 하셨지만, 그게 아들 덕에 효도 관광 다녀온 자랑이라는 걸 가족들 모두 알았다. 할머니는 다짐하듯 한마디 더 하셨다. "다신 안 먹어도 되겠다." 노인네 잡숫기엔 불편함도 있었겠지만 기내식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좁은 좌석에서 요리조리 포장을 벗기는 수고스러움, 물컵 놓을 자리 찾기 어려울 정도의 옹색함이야말로 '구름 위 식사'의 제일 큰 반찬이다.

    ▶1만m 상공에서는 미각(味覺)이 평균 30% 정도 감소해 감기에 걸렸을 때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한다. 그래서 기내식은 달고 짠 음식이 많다. 우리 국적기들은 한식으로 승부를 걸었다. 대한항공은 1998년 비빔밥으로, 2006년에는 비빔국수로 국제기내식협회(ITCA)가 그 해의 최고 기내식에 수여하는 '머큐리상'을 받았다. 후발 주자인 아시아나항공도 2007년에 영양쌈밥으로 같은 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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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내식은 이륙 24시간 전에 1차 주문을 하고 비행 4시간 전 최종 주문을 한다. 하루 8만명분을 넘기는 대한항공 기내식사업사업본부 매출은 2000억원이 넘고, 아시아나항공에 지난달까지 기내식을 공급했던 업체는 1800억원 정도였다. 영업이익률이 20%를 웃돌 정도로 수익성이 높지만 쉽지 않은 사업이다. 비행 스케줄과 톱니처럼 맞물려 제때 주문 물량을 공급하지 못하면 이륙 지연 등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일부터 시작된 아시아나항공의 '기내식 사태'가 길어질 모양이다. 기내식을 싣지 못한 채 이륙하는 여객기들이 꼬리를 문다. 7월부터 납품하기로 한 기내식 공급 업체에 문제가 생겨 소규모 업체들에 맡겼는데 하루 2만5000~3만명 분을 감당하지 못해 빚어진 일이라고 한다. 아시아나항공 사장이 회사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올리고 백배사죄했다.

    ▶연간 2000만명(연인원) 이상이 국제선을 타는 시대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비용이고, 큰맘 먹고 타는 사람들이 많다. 이탈리아 철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항공사들이 간편한 음식 대신 흔들리는 기내에서 포크와 나이프를 써야 하는 기내식을 제공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승객들에게 호사(豪奢)를 누리고 있다는 기분을 주려고." 기내식을 먹지 못한 승객들에게 30~50달러 쿠폰을 지급한다고 하는데 '기내식의 추억'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항공사가 알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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