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덕의 新줌마병법] 남자가 詩를 쓰기 시작했다

입력 2018.07.03 03:13

은퇴 앞둔 남자 詩에 빠졌네… 콩나물 전철에서도 한 수, 퇴근길 노을이 서러워 한 수
그 고독과 詩心 모르는 아내는 "시가 웬 말이냐" 구박하지만 시가 별건가, 인생이 별건가

김윤덕 문화1부장
김윤덕 문화1부장
허당 중에서도 으뜸이라 여긴 자들이 민주주의란 허명 아래 당선의 꽃길로 사뿐사뿐 내려앉자 남자는 화병 걸린 들소마냥 날 얼음을 와작와작 씹었다. "세상이 어찌 이럴 수가! 신이 있다면 어찌 이럴 수가!" 뉴스를 보다가도 구시렁대는 일 잦아졌다.

"대한민국에 사내가 없어. 백주 대낮에 사람이 두들겨 맞아도, 나라가 태풍 앞 촛불로 흔들려도 저 살 궁리만 하는 소인배들뿐이니. 잘못을 했으면 엎드려 빌어야지. 한 입으로 두말했으면 혀라도 깨물어야지. 영화 '쓰리빌보드'에 나오는 경찰서장을 보라고. 실수를 깨끗이 인정하고 제 머리에 총을 겨누잖아? 그런 결기가 있어야 남자지. 안 그래?" 설거지하던 아내가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다리 좀 그만 떨고 음식물쓰레기나 버리고 오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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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때로 쓰레기를 비우고 돌아오는 5분 안에 쓰이기도 한다. 대문을 박차고 들어선 남자가 흥분해서 외쳤다. "나, 시를 한번 써보려고! 쉰내 진동하는 쓰레기통 앞에 섰는데 돌연 JP가 남기고 간 '소이부답(笑而不答)', 이 네 글자가 가슴을 후벼 파는 거야. 밤하늘에 잔별 총총한데 인생 뭐 있나, 그냥 웃지요 싶은 게 시적 영감이 폭포수처럼 솟구치는 거야."

가족 단톡방에 시(詩)라는 이름의 거룩한 폭탄이 터지기 시작한 건 이튿날부터다. 출근길 콩나물 전동차 안에서 이리저리 떠밀리다 한 수, 퇴근길 성산대교 너머로 해 떨어지는 모습에 울컥해 한 수, 폐업점포를 지나다 산처럼 쌓인 재고품이 마치 자신인 양하여 또 한 수. 한번은 와이셔츠 단추 꿰매는 아내를 바라보다 유레카를 외쳤다. "실낱같은 단춧구멍에 어떻게든 걸려 있으려 안간힘 쓰는 저 단추를 보라고. 딱 우리네 삶 아닌가?"

[김윤덕의 新줌마병법] 남자가 詩를 쓰기 시작했다
/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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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인내가 임계점에 다다른 건 모기떼와 싸우다 겨우 잠든 한밤중, 만취해 귀가한 남자가 세차게 흔들어 깨웠을 때다. "여보 여보, 난리가 났어. 내 시를 후배들한테 읊어줬더니 더 늦기 전에 등단하라고 성화야 성화. 특히 '흉터'란 시! 유년기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이마에 난 작은 흉터를 첫사랑에 비유한 그 절명시에 다들 뒤집어졌다고. 리얼, 진짜라니까!"

아내의 눈에서 불꽃이 튄 건 5초 뒤. 불꽃은 삽시간에 대륙간탄도미사일로 변해 무방비 상태의 남자를 향해 날아갔다. "동틀 때까지 술을 마시든, 필름이 끊겨 첫사랑 등에 업혀오든 상관 안 할 테니 어부인 단잠은 깨우지 말랬지. 시가 그렇게 쉽게 쓰이는 거면 윤동주가 왜 머릴 쥐어뜯으며 괴로워했겠어. 별 한 번 바라봤다고 시가 툭 떨어지면 전국 236개 국문과는 오늘로 문 닫아야겠네. 결빙의 순간까지 온몸으로 진흙을 토해내는 추어탕집 미꾸라지처럼 써야 하는 게 시란 말 몰라? 고독을 순금처럼 지니고 살아도 될 둥 말 둥인데, 땅에 머리만 닿으면 코골이요, 눈만 뜨면 일장연설이라 고독할 겨를 없는 당신한테 시가 웬 말이야. 어디, 나도 한 수 읊어볼까? 제목, 남편. 집에 두고 오면 근심덩어리, 같이 나오면 짐덩어리, 밖에 내보내면 걱정덩어리, 마주앉으면 웬수덩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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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겁한 건 장모였다. "평생 전자부품만 만지던 사위가 시를? 남자가 자아를 찾기 시작하면 엇나가는 거 한순간이다 너. 도끼눈 뜨고 잘 살펴, 이것아." 갱년기의 시작이란 분석도 나왔다. "차라리 시가 낫다 얘. 돈은 안 들잖니. 우리 형부는 은퇴하자마자 파마부터 하더니 청바지 입고 피아노 배우러 다닌다더라."

아내가 남자의 시작(詩作)을 적극 장려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장대비 쏟아지던 날, 얼큰히 취해 퇴근한 남자가 기말고사 코앞인 아들 방에 들어가 목놓아 푸념했다. "유비가 제갈량을 스카우트했을 때 그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단다. 조선의 지성계를 뒤흔든 조광조가 한시대를 호령하다 사약을 받아든 게 서른일곱. 이문열은 나이 서른에 '사람의 아들'을 발표하고, 음바페는 고작 열아홉에 '축구 영웅' 소릴 듣는데, 낼모레 육십인 나는 이룬 것이 하나 없네. 니체가 말했던가. 삶이란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과 같아서, 건너가는 것도 힘들고, 돌아서는 것도 힘들고, 멈춰 서 있는 것도 힘들다고. 아빠가 딱 그렇다."

통곡 일보 직전인 남자를 끌고나오며 아내가 말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시심(詩心)은 너끈히 장착된 듯하니 이제 죽어라 쓰기만 하면 되겠어. 까짓것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문학상 한번 받아주지 뭐. 비도 억수로 오는데 오늘은 뭐 떠오르는 시상(詩想) 없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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