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정다운

경기도에 사는 이설희(가명·38)씨는 소송 끝에 남편과 이혼했다. 4년간 이어진 결혼 생활은 통제의 연속이었다. 전 남편은 이씨가 혼자 외출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일단 이씨가 집을 나서면 어디 있었는지 분(分) 단위로 보고하게 했다. 귀가 후에는 이씨의 휴대전화를 빼앗아 통화 목록을 확인하고 그 번호로 전화를 걸기도 했다. 이혼 소송을 맡은 법원 재판부는 "아내를 늘 불안과 긴장 속에 살게 했다"며 남편에게 이혼 책임이 있다고 했다.

신체를 때리는 가정 폭력은 줄어들고 있지만 상대의 행동과 심리를 제약하는 '통제형 가정 폭력'이 늘어나고 있다. 여성가족부가 2017년 발표한 '가정 폭력 실태 조사'에 따르면 "배우자로부터 과도한 통제를 당한다"고 답한 기혼 남녀는 37.7%였다. 남녀 피해 비율이 비슷했다. 반면 신체적 폭력은 3.7%로 1998년 조사(31.4%)보다 10분의 1로 줄었다.

전문가들은 이런 통제형 가정 폭력의 예로 친구나 친정 식구와 연락하거나 만나지 못하게 하는 행동, '바람을 피운다'고 의심하며 임신을 종용하는 행동 등을 꼽았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박소현 부장은 "최근 상담 피해자 가운데 가족의 통제 때문에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며 "이런 통제가 장기간 방치되면 신체적 폭력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 가정폭력방지법을 시행하고 있지만 부부나 가족 간 과도한 강요·통제 등 심리적 폭력은 처벌 대상에 빠져 있다. 반면 영국은 2015년 중범죄법(Serious Crime Act)을 개정해 강압적 통제 행위 등 가족 간 심리적 폭력에 대해서도 최대 5년 금고나 벌금형을 부과할 수 있게 했다. 프랑스도 2010년 가정 내 심리적 폭력을 처벌하는 법을 제정했다. 한국분노관리연구소 이서원 소장은 "신체적 폭력이 범죄라는 인식이 높아지면서 물리적인 가정 폭력은 줄어들었지만, 그만큼 가정 폭력 가해자들도 영리해지고 있다"면서 "가정 폭력에 대한 새로운 대책 마련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