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설계자이자 中情 창설자, 박정희와 함께 산업화 이끌고…

조선일보
  • 최경운 기자
    입력 2018.06.25 03:45

    [김종필 1926~2018]
    - 풍운아 JP, 영욕의 인생
    처삼촌 박정희와 5·16 정변 주도… 中情 부장으로 대일청구권 협상

    23일 별세한 김종필(金鍾泌·JP) 전 국무총리는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며 대한민국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김 전 총리는 이후 2004년 정계 은퇴를 선언할 때까지 43년간 한국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국무총리 2번, 헌정 사상 최다선인 9선(選) 의원, 네 정당 총재·대표를 지냈다. 그러면서도 시(詩)·서(書)·화(畵)와 음악을 즐겨 '로맨티시스트'란 말을 들었다.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는 "낭만적 정치인 김종필 손에 권력이 넘어갔다면 좀 더 합리적 민주화가 가능하지 않았을까"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영원한 2인자'라는 세평을 남기고 떠났다.

    ◇5·16 설계자

    김 전 총리는 1926년 충남 부여의 비교적 부유한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대전사범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 광복 후 서울대 사범대를 거쳐 육사(8기)를 졸업하고 군문에 들어섰다. 그는 1961년 처(고 박영옥 여사) 삼촌인 박정희 당시 육군 소장(少將)이 주도한 5·16 군사정변에 참여했다. 한 해 전 있었던 '정군(整軍)' 운동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육군 중령에서 강제 예편한 직후였다. 실제 그는 4·19 혁명 직후 박정희 장군과 거병(擧兵)에 뜻을 모으고 군내 세력 규합과 병력 동원 등을 준비했다.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금조(今朝) 미명(未明)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로 시작하는 '5·16 혁명 공약'도 그의 손에서 나왔다.

    김종필(왼쪽) 전 국무총리가 공화당 의장 시절, 당시 박정희(오른쪽)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
    공화당 의장 김종필과 박정희 - 김종필(왼쪽) 전 국무총리가 공화당 의장 시절, 당시 박정희(오른쪽)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 1961년 5·16 군사정변에 참여해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했던 김 전 총리는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을 주도했다. /조선일보 DB
    그는 5·16 성공 이후 1961년 6월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초대 부장이 됐다. 1962년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과 회담을 통해 대일 청구권 자금 협상의 물꼬를 튼 것도 이때 일이다. 당시 회담에서 김 전 총리가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방해되면 독도를 폭파하자'고 제안했다는 얘기도 있다. 이에 대해 김 전 총리는 생전에 "오히라가 독도 문제를 꺼내기에 '독도를 폭파했으면 했지 당신들한테 줄 수는 없다'고 한 말이 왜곡돼 돌아다닌 것"이라고 했다. 당시 30대였던 JP가 협상을 위해 방일했을 때 객지에 혼자 묵는 남자의 심정을 적은 일본 단가(시조와 비슷한 짧은 전통시)가 숙소에 걸려있는 걸 보고, 여관 주인을 불러 "이런 시를 쓸 사람은 일본에 단 한 사람, 모리시게 히사야(1913~2009)뿐"이라고 시인 이름을 알아맞힌 일은 일본 정가에서 두고두고 회자됐다. 그만큼 일본을 깊이 아는 지일파로 통했다.

    김 전 총리는 1963년 중정 부장을 그만두고 민주공화당 창당을 주도해 같은 해 치러진 6대 총선 때 고향 충남 부여에서 당선됐다. 이후 공화당 총재를 거쳐 1971년부터 4년 6개월간 국무총리를 지냈다. 하지만 1972년 박 대통령의 유신(維新) 선포 이후 그의 위상은 '박정희의 동지'에서 '조력자'로 내려앉았다. 김 전 총리는 생전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은 이후락·윤필용·하나회처럼 경계해야 할 대상은 옆에 키워놓고서 쓸데없이 나를 경계했다"며 "그것이 권력 종말의 시작이었다"고 했다. 10·26 사건으로 유신 정권이 붕괴하면서 그의 정치 인생 1막도 끝났다.

    김종필 전 총리가 걸어온 길
    ◇10·26 후 정치 활동 금지

    김 전 총리는 1980년 신(新)군부 세력의 5·17 비상계엄 조치 당일 보안사에 연행됐다. 그길로 서울 서빙고 보안사 분실에 구금돼 46일간 조사를 받았다. 공화당 총재, 국회의원 자리에서도 물러났다. 신군부는 그가 216억여원을 축재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신군부가 장학 재단 소유 재산 등을 개인 재산으로 간주해 부정 축재자란 오명(汚名)을 뒤집어씌운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 2016년 펴낸 '김종필 증언록'에서 "나는 사무사(思無邪·사특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를 일생의 도리로 삼았다"며 당시 일에 대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해명을 요구했다. 정치 활동을 금지당하고 미국으로 떠난 김 전 총리는 1986년 귀국해 정계 복귀를 노렸다. 1987년 직선제 개헌이 이뤄지자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한 그는 같은 해 12월 치러진 대선에 출마해 8.1% 득표율로 4위를 했다. 정치 인생 2막의 시작이었다.

    ◇3당 합당과 분당, DJP 연합

    김 전 총리가 이끄는 신민주공화당은 1988년 13대 총선에서 35석을 얻었다. 반면 민정당은 절반 의석(150석)에 못 미치는 125석을 얻었다. 여소야대(與小野大) 구도에 갇힌 노태우 대통령은 1990년 1월 김영삼(YS) 전 대통령, 김 전 총리와 함께 이른바 '3당 합당'을 결행했다. 김 전 총리는 당시 "보수 대연합과 보혁 구도로 정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결단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1992년 YS가 대통령이 된 후 김 전 총리는 상도동계의 집중 견제를 받게 됐고, 1995년 결국 민자당을 탈당했다. 탈당하면서 그는 "나에겐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몇 마일이 더 남아있다"고 했다. 이듬해 15대 총선에서 김 전 총리는 "충청도가 핫바지유?"라는 말 한마디로 돌풍을 일으켰고 자민련은 50석을 차지했다. 신한국당은 절반에 못 미치는 139석,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새정치국민회의는 79석을 얻었다. YS·DJ·JP의 '신(新)3김 여소야대 체제'가 등장한 것이다. '양김' 사이에서 캐스팅 보트를 쥔 김 전 총리는 1997년 대선에서 DJ의 손을 들어줬다. 그는 27년 만에 두 번째 총리 자리에 올랐다. 정치 인생 2막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DJ도 그의 숙원인 내각제 개헌을 들어주지 못했고, 대북 정책 등에서 이견을 보이며 공동 정부는 무너졌다. 자민련은 2000년 총선에서 17석을 얻으며 참패했다.

    ◇"정치는 허업(虛業)" 남기고 정계 은퇴

    2004년 17대 총선은 김 전 총리의 마지막 선거가 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 속에 치러진 이 총선에서 자민련은 4석을 얻는 데 그쳤다. 그는 "이제 완전히 연소돼 재가 됐다"며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 뒤 언론 인터뷰 등에서 "정치는 허업이다. 서쪽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고자 했는데…"라는 말을 남겼다. 이후 조용히 은퇴 생활을 보내던 그는 부인 박 여사가 2015년 5월 별세하자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다. 만년에 '구십이지팔십구비(九十而知八十九非·아흔 해를 살았지만 지난 89년이 헛된 것 같은 생각을 떨칠 수 없다)'란 말을 되뇌었다는 김 전 총리는 허업의 세계를 떠나 아내 곁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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