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직한 서민의 음식에서 제대로 된 한 그릇 요리로
유명 셰프까지 가세한 곰탕 열풍
점심을 먹으며 저녁 메뉴를 고민하듯, 하나의 음식 유행이 뜨겁게 타오를 때 그것의 다음을 보는 게 진정으로 음식을 즐기는 자의 자세가 아닐까. 냉면의 강력한 유행에서 한줄기 빠져나온, 작지만 옹골찬 유행 하나를 점쳐보자면 바로 곰탕이 아닐까 한다. 어른들의 속풀이 음식이라는 이미지도 걷어차고, 할머니가 꼬부라진 허리로 고아내는 주방의 모습도 확 바뀐 채 말이다.
◇ 냉면의 유행 뒤따를 ‘곰탕’의 물결이 시작됐다
그러니까 ‘곰탕 뉴웨이브’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도, 하동관이라는 확실한 선택지와 김포공항에 들를 때나 겨우 가는 먼 거리의 방화동 원조나주곰탕, 그리고 또 다른 몇 군데 미적지근한 프랜차이즈 곰탕을 제외하면 사실 이렇다 할 대안이 없었던 마당에 두 팔 들고 환영하고 싶은 반가운 흐름이다.
평양냉면 열풍이 곰탕 열풍으로 정확히 전이되었다고 볼 순 없지만, 서로를 잇는 공통 요소들이 있다. (물론 두 메뉴는 구성 재료와 조리 방식이 비슷해 이 둘을 함께 파는 곳도 많다.) 젊은 세대들이 만든 평양냉면의 열풍 덕에 곰탕을 대하는 이미지도 훨씬 ‘힙’해졌다.
이해림 푸드라이터는 지난 6월호 ‘GQ’ 기고 글에서 두 메뉴 모두 ‘고깃국물’이라는 공통점에 주목했다. 2등급 3등급보다도 1등급 쇠고기가 월등하게 많을 정도로 상향 평준화된 한우 시장 덕에 이를 활용한 음식점들도 상향 평준화됐다는 해석이다. 그 덕에 한쪽에선 ‘한우 오마카세’가, 또 다른 한쪽에선 냉면과 곰탕이 진하게 우러나고 있는 것이다.
◇ 곰탕과 싱글 몰트위스키가 만났다? 이색 곰탕집 눈길
곰탕이 냉면만큼 뜨겁게 느껴지게 된 데에는 내로라하는 셰프들이 ‘곰탕’을 만들기 시작한 영향이 크다. 인천공항 제2터미널 개항과 동시에 미식가들은 미쉐린 투스타 ‘정식당’의 임정식 셰프가 만든 ‘평화옥’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작년부터 쌀국수, 냉면 팝업 이벤트를 하며 고깃국물 뽑는 일에 몰두하던 그가 곰탕집을 냈으니 먹기 전부터 침이 흐를 수밖에.
요즘 임정식 셰프의 SNS에는 드럼통만 한 곰솥에 매진한 모습이 더 자주 보인다. 박찬일 셰프는 돼지 곰탕집인 ‘광화문 국밥’에 이어 대치동에 냉면과 곰탕을 파는 ‘광교옥’을 내기도 했다. 방송을 통해 얼굴을 알린 이재훈 셰프가 문정동에 문을 연 ‘진심 선농탕’도 있다.
유명세 누리는 셰프만 곰탕을 새로운 시대의 요리로서 조명하고 있는 건 아니다. 곰탕에 제대로 매진해 문을 열자마자 냉면 애호가는 물론 미식가들의 이목을 잡아끈 신흥 곰탕집들도 많다. 이름부터 우직한 돌직구를 던지는 마포의 ‘곰탕수육전문’은 이 열풍의 가장 시작점에 있는 곳이다. 하동관에 고기를 납품하는 팔판정육점의 고기를 쓴다. 이보다 앞서 문 연 합정동 합정옥도 늘 함께 거론되며 서로의 인기를 높이고 있다.
가장 최근엔 도화동의 ‘도하정’도 이 근방에서 일고 있는 곰탕 뉴웨이브에 올라탔다. 올해 3월께에 문을 연 논현동의 ‘언주옥’은 프리미엄 한우로 유명한 마장동의 ‘본앤브래드’의 고기를 쓰는 것으로 입소문을 탔다. 깊은 맛보단 개운하고 깔끔한 맛이 돋보이는 곰탕을 낸다. 비슷한 시기에 문을 연 역삼동 ‘평양옥’은 냉면과 곰탕을 함께 판매한다. 지금은 냉면이 불티나게 나가고 있지만, 맑은 국물에 강력한 감칠맛을 품은 곰탕도 숨은 무기다.
이 열풍과 관계없이 묵묵히 버크셔 K 돼지로 곰탕을 만들어온 서교동 옥동식도 곰탕을 이야기할 때 놓칠 수 없는 요즘 시대의 곰탕집이다.
유행은 무섭다. 얼마 전에는 곰탕과 싱글 몰트위스키를 함께 파는 현대적인 가게 ‘옥반상’도 문을 열었다. 이 더위가 한풀 지나고 나면 또 어떤 해석이 붙은 곰탕이 등장할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긴 하루 고단한 노동의 끝을 곰탕으로 씻어 내던 시절은 저물었다. 우리가 곰탕을 먹는 이유는 정말 좋은 재료로 잘 만든 요리 한 그릇이라서, 혹은 맛보고 싶은 새로운 가게들이 많이 생겨서, 혹은 그저 SNS에서 자주 봐서 불현듯 먹고 싶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손기은은 남성 라이프스타일 월간지 ‘GQ KOREA’에서 음식과 술을 담당하는 피처 에디터로 11년 째 일하고 있다. 이제 막 문을 연 레스토랑의 셰프부터 재야의 술꾼과 재래시장의 할머니까지 모두 취재 대상으로 삼는다. 바람이 불면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신다. 하지만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