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참모습 담으려 빈민가·유흥가도 누볐죠"

조선일보
  • 유지한 기자
    입력 2018.06.14 03:01

    서울 답사기 펴낸 김시덕 교수, 재임용 갈등 계기로 기록 나서
    "바람직한 서울의 모습은 없어…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바라봐야"

    지난 11일 서울 지하철 1호선 영등포역 뒤 후미진 골목. 김시덕(43)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가 저 멀리 한 곳을 가리켰다. 광복 직후 지어진 낡은 1~2층 집들, 20~30년 된 3~4층의 빌라와 꼬마 빌딩, 20층이 넘는 고층 아파트들과 전면이 유리로 덮인 타임스퀘어 빌딩이 차례로 나타났다.

    "저는 도시의 화석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땅 아래에 지층이 있다면, 땅 위에는 시층(時層)이 있습니다. 시층을 따라가다 보면 시민들이 부대끼며 살아온 진짜 서울의 모습을 볼 수 있죠."

    많은 사람은 서울 하면 사대문과 궁들을 떠올린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김시덕 교수는 발끈한다. 일본학과 한국학을 연구하는 문헌학자인 김 교수는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바라본 서울'을 기록하고 있다. 문화 유적지뿐 아니라 아파트 단지와 빈민가, 유흥가 등 생활 터전을 찾았다. 최근 이 내용을 모아 '서울선언'이라는 제목의 책도 냈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는 “낡은 건물과 마천루가 뒤섞여 흉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있는 자체의 서울을 인정하고 바라봐야 한다”고 했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는 “낡은 건물과 마천루가 뒤섞여 흉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있는 자체의 서울을 인정하고 바라봐야 한다”고 했다. /장련성 객원기자

    김 교수가 서울을 기록하게 된 것은 학내 갈등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김 교수는 일본의 권위 있는 학술상을 받는 등 일본 문헌학계에서 인정받아 2013년 서울대 규장각 소속 교수로 채용됐다. 작년 재임용 과정에서 서울대 인문대 측은 "연구 실적이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며 불가를 통보했다. 심사의 공정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었고, 김 교수가 서울대 출신이 아니어서 차별을 받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는 고려대 일어일문학과 학부와 석사를 거쳐 일본 국문학 연구 자료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본부가 재심사를 지시했고 결국 재임용됐다. 김 교수는 "어려운 일을 겪고 나니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며 "떠나기 전 서울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싶었고, 화를 삭이려 서울을 무작정 걸었다"고 했다.

    걷다 보니 그동안 보지 못한 것들이 보였다. 그는 "사람들은 사대문 안의 궁궐 등 '조선시대' 유적만 찾아다니고, 일제의 잔재와 미군의 흔적은 외면하거나 지우려 한다"며 "그렇게 해선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볼 수 없다"고 했다.

    2015년 청량리에 있던 경성제국대학 예과 건물은 식민지 시절 조선총독부가 세운 건물이라는 이유에서 철거됐다. 김 교수는 "찬란한 역사만을 찾으려 하지 말고, 초라하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서울 모습을 들여보자"고 했다. 예컨대 서울 풍납토성엔 4~5세기 백제 유적, 그 옆엔 조선시대쯤부터 형성된 마을들 그리고 고층 아파트들이 모여 있다. "낡은 건물과 마천루가 뒤섞여 흉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람직한 서울의 모습은 따로 없습니다. 있는 자체의 서울을 인정하고 바라봐야 합니다."

    김 교수는 "누구든 기록하고 남겨야 한다"고 했다. 김 교수도 휴대전화 하나 들고 가방만 둘러맨 채 서울을 누빈다. 그는 "시민들이 주변 일상에서 서울의 참모습을 볼 수 있게 돕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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