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서 잘려나간 '흰옷' '엄마를 부탁해'

조선일보
  • 정상혁 기자
    입력 2018.06.11 03:00

    번역본에서 원문 대폭 삭제돼… 佛역본선 15쪽 분량 들어내기도

    이청준(왼쪽), 신경숙
    이청준(왼쪽), 신경숙
    '번역 않기'도 번역의 형태로 볼 수 있을까? 소설가 이청준(1939~2008)의 '흰옷'과 신경숙(55)의 '엄마를 부탁해' 외국 번역본에서 원문의 상당 분량이 '삭제'돼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공교롭게도 올해는 이청준 10주기, '엄마를 부탁해' 출간 10주년을 맞는다.

    8일 한국외대 통번역연구소 주최 학술대회에서 번역가 남윤지(45)씨는 "이청준 소설 '흰옷'의 2001년 프랑스어 번역본(악트쉬드 출판사)에서 과도한 '삭제'가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원본과 번역본을 대조한 결과 소설 전체에서 57군데가 삭제됐고, 많게는 15쪽 분량이 한꺼번에 잘려나갔다"는 것이다. 1994년 출간된 '흰옷'은 그해 대산문학상을 받았고, 6·25전쟁을 배경 삼아 세대 간 갈등과 화해를 상징하는 소설로 평가받는다.

    연구 자료에 따르면, 대대적인 삭제가 발생한 부분은 2장 '바람의 신화'와 6장 '버꾸농악으로 씻기다'. 주로 작품의 주요 소재인 '노래'의 제목이나 가사, 지리적 배경 등의 설명이 제거됐는데, 특히 2장에서 주인공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더덕밭의 사연을 아버지 말년과 연계해 회상하고 이어 회한 가득한 제 삶의 내력을 풀어내는 부분(각 7쪽, 15쪽 분량)이 잘려나갔다.

    소설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6장의 위령굿 전개 과정도 군데군데 지워지고, 14쪽 가까운 씻김굿의 단계별 설명도 통째로 빠졌다. 남씨는 "외국 독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라 판단해 역자가 자의적으로 뺐을 수 있지만, 읽을지 말지는 독자에게 맡겨야 한다"며 "이 문제는 재번역의 필요성으로 귀결된다"고 말했다.

    번역에서 '삭제'와 '생략'은 구분된다. 생략은 문장의 문법·구조적 측면에서 어떤 정보를 제거하는 것이고, 삭제는 원문의 필수 요소나 문장 전체를 아예 나타내지 않는 것을 일컫는다. 생략에 비해 삭제가 작품 미학에 미치는 영향이 클 수밖에 없다.

    신경숙의 베스트셀러 '엄마를 부탁해'도 마찬가지다. 레바논에서 2011년 출간된 아랍어 번역본(아랍 사이언티픽 퍼블리셔스)에서도 중대한 삭제가 발견됐다는 것. 영역(英譯)을 다시 아랍어로 옮긴 중역인데, 이날 번역가 김주희(60)씨의 발표에 따르면, 이 번역본은 원본의 4장 '또 다른 여인'을 아예 옮기지 않았다. 치매 걸린 엄마가 실종되는 내용의 이 소설에서 4장은 처음으로 엄마가 1인칭 시점으로 등장하고, 엄마가 힘들 때마다 남몰래 만났던 외간 남자를 찾아가는 등 중요한 반전의 역할을 한다.

    김씨는 "이 부분의 삭제로 엄마의 희생적인 모습만 부각돼 저자가 의도한 인물 성격이 구현되지 못했다"고 평가하면서 "종교나 문화적 이유로 삭제됐을 수 있으나 정확한 까닭은 역자만이 알 것"이라고 했다. 한국문학번역원 관계자는 "아랍권 번역 인력이 부족한 게 사실"이라며 "향후 검토 후 재번역 지원도 고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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