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남의 시로 가꾸는 정원] [15] 金星라디오

조선일보
  • 장석남 시인·한양여대 교수
    입력 2018.06.11 03:09

    金星라디오

    金星라디오 A 504를 맑게 개인 가을날
    일수로 사들여온 것처럼
    五백원인가를 깎아서 일수로 사들여온 것처럼
    그만큼 손쉽게
    내 몸과 내 노래는 타락했다

    헌 기계는 가게로 가게에 있던 기계는
    옆에 새로 난 쌀가게로 타락해가고
    어제는 카시미롱이 들은 새 이불이
    어젯밤에는 새 책이
    오늘 오후에는 새 라디오가 승격해 들어왔다

    아내는 이런 어려운 일을 어렵지 않게 해치운다
    결단은 이제 여자의 것이다
    나를 죽이는 여자의 유희다
    아이놈은 라디오를 보더니
    왜 새 수련장은 안 사왔느냐고 대들지만

    ―김수영(1921~1968)

    [장석남의 시로 가꾸는 정원] [15] 金星라디오
    공업 제품의 고유 번호가 시에 정식으로 등장한 것은 아마도 이 시가 처음이지 싶습니다. 52년 전에 발표했으니 이 제품도 이제 골동이 되어 어느 장식장을 꾸미고 있을 겁니다. 금성사의 국산 4호 진공관 장착 라디오라고 합니다.

    가난한 시인의, 소심한 가장의, 지식인의 내면이 이토록 투명하게, 이토록 서글프게 드러난 시가 또 있을까요? 첨단 상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일수'로 들여놓는 '타락'을 이 시는 정면으로 응시합니다. 헌 기계는 집에서 가게로, 가게에 있던 기계는 새로 난 쌀가게로 차례대로 밀려나는 통찰을 통해 소외 문제를 드러냅니다.

    '결단은 이제 여자의 것이다'라는 예지력 있는(?) 선언이 흥미롭습니다. 반세기 전의 첨단 노래가 '제품 번호'를 달리하여 펄펄 살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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