伊경제 어쩌나

입력 2018.06.11 03:00

[이탈렉시트 가능성은?] 나랏빚 3000조원인데 저소득층에 月100만원

'글로벌 시한폭탄' 된 이탈리아 경제

파리=손진석 특파원
파리=손진석 특파원
주세페 콘테 신임 이탈리아 총리가 지난 5일(현지 시각) 상원에서 첫 공식 연설을 했다. 저소득층에 월 780유로(약 98만원)의 기본 소득을 지급하고, 소득세를 20% 단일세율로 낮추는 감세(減稅)를 약속했다. 연정(聯政)을 구성한 포퓰리즘 정당 오성운동과 극우 성향 동맹당의 공약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70분의 연설 도중 박수가 40번이나 터져나왔지만, 콘테의 연설을 실시간으로 전해 들은 유럽의 금융시장은 공포에 빠져들었다. 이탈리아 국채를 판다는 주문이 쏟아져 10년물 국채 수익률이 전날 연 2.567%에서 하루 만에 2.876%로 급등했다(국채 가격 하락). 사흘 뒤 8일에는 3.116%까지 치솟았다. 5월 초만 하더라도 1.7%대였던 수익률이 한 달 사이에 1.4%포인트 이상 오른 것이다. 3000조원이 넘는 나랏빚을 줄이기는커녕 선심성 정책을 쏟아내겠다는 계획이 발표되자 불안감이 엄습한 투자자들이 서둘러 발을 뺀 것이다.

◇나랏빚 3000조원인데 포퓰리즘 등장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19개국)에서 독일, 프랑스에 이어 셋째로 경제 규모가 큰 이탈리아의 앞길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반(反)EU·반유로존 성향의 포퓰리즘 정부가 등장해 선심성 정책을 쏟아내겠다는 구상을 밝히자, 2011년 재정 위기에 이어 이탈리아가 7년 만에 다시 수렁에 빠져들 수 있다는 경고가 쏟아지고 있다.

지난해 이탈리아의 국가채무는 2조8381억달러(약 3056조원)에 이른다. GDP(국내총생산)의 131.8%에 달해 국가채무 비율이 EU 28개 회원국 중 그리스(178.6%) 다음으로 높다. EU 평균(81.6%)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 해 이자 비용만 100조원쯤 나간다.

그래도 최근 3~4년 사이 긴급한 위험 신호는 나오지 않았다. 2011년 재정 위기 이후 연금 수령 연령을 65세에서 67세로 늦추는 등 긴축 정책을 하나둘 시행하면서 안정을 찾고 있었다. 세계 경제가 호황을 누리는 흐름에도 올라탔다. 2014년부터 3년간 0%대 성장을 했지만 작년에는 1.5% 성장률을 보이며 회복세를 보였다.

6일 새 정부 신임 투표를 위해 하원을 방문한 콘테 총리가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
포퓰리즘·극우 연합 정부를 이끌게 된 주세페 콘테 신임 이탈리아 총리는 저소득층에 기본 소득 월780유로(약 98만원) 지급, 소득세 감세 등을 추진 중이다. 사진은 6일 새 정부 신임 투표를 위해 하원을 방문한 콘테 총리가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그러나 올해 3월 총선을 계기로 갑작스럽게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긴축 정책에 지치고 몰려드는 난민에 거부감이 커진 유권자들이 급진적인 신생 정당에 몰표를 던졌다. 기본소득 지급을 약속한 오성운동은 108석에서 227석으로 의석을 늘리며 원내 1당으로 자리매김했다. 난민을 몰아내겠다고 강조한 극우 성향 동맹당은 16석짜리 군소 정당에서 125석의 원내 2당으로 약진했다. 반면 집권 민주당은 292석에서 112석으로 몰락했다. '정치 대지진'이 벌어진 것이다.

◇선심 정책 실행에 연 100조원 필요

총선 후 석 달간 이탈리아는 정부 구성 작업이 공전을 거듭했다. 과반수 정당이 없었던 탓이다. 그러다 5월 말 오성운동과 동맹당이 연정 구성에 합의하자 유럽의 금융시장은 공포에 짓눌리기 시작했다. 우선 두 정당이 반(反)EU 성향이라 유로존 탈퇴를 시도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유로존에서 셋째로 큰 이탈리아가 탈퇴할 경우 유로존이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워지거나, 유로화 가치가 급락할 수 있다.

유로존에 남아도 문제다. 재정 지출을 대폭 늘리는 공약을 시행하다가 빚을 감당하지 못해 무너질 경우 유로존 전체를 늪으로 끌고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를 버릴 수도 없고, 껴안고 있자니 폭탄을 안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게 EU의 딜레마다.

이탈리아 새 정부가 저소득층에 기본소득을 지급하고, 연금을 받는 첫 연령을 67세에서 65세로 되돌리는 등 선심성 공약을 모두 실행하면 연간 1000억유로(약 126조원)가 추가로 필요하게 된다. 특히 최고 44%인 소득세율을 20% 단일 세율로 낮추는 감세를 시행할 경우 세입(歲入)은 전년 대비 4% 줄어들고, GDP 대비로는 1.9% 감소하는 구멍이 불가피하다고 이탈리아 싱크탱크인 브루노 레오니 연구소는 추산했다. 유로안정화기구(ESM)의 클라우스 레글링 의장은 "새 정부가 계획한 것의 50%만 실행으로 옮겨도 가을부터 이탈리아는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했다.

만약 이탈리아가 무너질 경우 충격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스를 살리느라 투입된 구제금융이 8년간 3260억유로(약 412조원)였는데, 이탈리아의 경제 규모는 그리스의 9.7배에 달한다. 로이터통신은 "이탈리아호(號)가 침몰할 경우 유럽은 물론 전 세계에 얼마나 큰 충격이 다가올지 가늠조차 어렵다"고 보도했다.

◇국민 다수는 유로존 잔류 원해

천문학적인 빚 덩어리 외에도 이탈리아 경제는 구조적인 아킬레스건이 여럿이다. 가족 단위 중소기업이 절대다수이고, 수출형 거대 제조업체가 거의 없다. 글로벌 대기업들이 각축전을 벌이는 세계 경제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다는 뜻이다.

장기적인 전망도 어둡다. 유럽에서 가장 심각한 수준의 저출산·고령화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이탈리아 출생아는 46만4000명으로 1861년 통일 국가로 출범한 이후 가장 적었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1350만명으로 전체의 23%에 달해 EU에서 가장 고령화된 나라다. 인재 유출도 심각하다. 지난해 기준으로 청년 실업률이 36.9%에 달한다. 일자리를 구하려는 젊은이들이 프랑스, 영국 등 해외로 대거 떠난다. '이탈리아에서 살지 않는 이탈리아인'은 540만명에 달하며, 그중 150만명이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고국을 등진 것으로 이탈리아 이민재단은 추산한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은 여러 악재에도 이탈리아가 빠른 속도로 쓰러질 가능성은 낮다는 점이다. 국채의 65%를 내국인 투자자들이 보유하고 있어 극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다. 훙 트란 국제금융협회(IIF) 전무는 "이탈리아가 그리스 수준의 재정 위기를 몰고 올 확률은 15~20% 정도"라고 밝혔다. 또 콘테 내각이 '이탈렉시트(이탈리아의 EU 탈퇴)'를 급격하게 추진하기는 어렵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유로존 탈퇴에 반대하는 응답이 60% 이상으로 나오고 있어서 여론을 거스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이탈리아 국채의 절반이 만기가 5년 안에 도래한다"며 "시장 금리가 더 오르기 전에 만기가 돌아오는 국채를 장기 국채로 차환 발행해서 위험을 줄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