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죽여! 다 죽여 버리라고!”

왕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드디어 샤를 9세(Charles Ⅸ)를 둘러싼 측근들이 간절히 원했던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여기서 '모두'는 왕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콜리니(Coligny·1519~1572) 제독을 비롯한 신교도 우두머리 스무 명을 뜻했다. 마침 그들 모두는 파리에 머물고 있었다. 며칠 전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된 신교도의 수장 앙리 드 나바르(Navarre·1553~1610)와 왕의 여동생 마르그리트(Marguerite·1553~1615)의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했기 때문이었다. 왕의 어머니인 카트린(Catherine· 1519~1589)과 가톨릭 귀족들은 결혼식을 정적을 제거하는 기회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들은 왕을 거세게 압박했고 드디어 재가를 얻어낸 것이다. 카트린은 침착하게 처형 담당자를 결정했다.

1572년 8월 24일 새벽, 성당의 종이 울리자 살인자들은 일제히 행동을 계시했다. 콜리니 제독이 가장 먼저 살해됐다. 광기(狂氣)는 순식간에 파리 전역으로 번졌다. 왕의 입에서 튀어나온 '모두'의 범위는 가볍게 스무 명의 경계를 넘어섰다. 신교도뿐 아니라 더 많은 가톨릭교도가 평소에 개인적으로 원한을 가졌던 이웃에 의해 살해됐다.

재미 삼아 벌어진 살인과 약탈, 강간과 방화도 무수했다. 왕의 명령도, 법의 권위도 파리 시민들의 광기 앞에선 무력했다. 몇몇 광신적인 사제들이 부추기는 가운데, 인간사냥은 사흘 동안 계속됐다. "센강 쪽으로 내리막을 이룬 골목길마다 마치 폭우라도 쏟아진 듯 피가 급류처럼 흘렀다."(총사령관 타반느·Tavannes· 1509~1575)

파리의 학살 소식은 바람처럼 지방으로 퍼져나갔다. 학살의 비극은 지방에서는 석 달 동안 계속됐다. 전국에서 1만~1만4000명이 희생됐다. 가톨릭과 신교 간의 화해는 루비콘강을 건넜다. 피로 물든 결혼식은 더 깊은 증오와 더 피비린내 나는 내전(內戰)을 프랑스의 앞날에 내던졌다. 파리의 심장 노트르담 성당

이 참담한 비극은 파리의 심장인 노트르담 성당에서 시작됐다. 고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파리의 중심은 센 강 위에 항공모함처럼 떠 있는 '시테섬'이었다. 방어에 적합해서다. 그 시테섬의 중심이 노트르담 성당이다. 대표적인 고딕양식으로 당당하고 반듯하다. 성당 정면에 세워진 두 탑은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그 가운데 놓인 거대한 장미창은 은은한 화려함을 뽐낸다. 장미창 아래 일렬로 늘어선 왕들의 동상에는 위엄이 넘쳐난다. 이곳이 중세 이래로 프랑스 왕들이 미사를 드렸던 '왕의 교회'임을 생각하면, 외관이 뿜어내는 장중함은 어쩌면 당연하다. 다양한 스테인드글라스와 조각으로 장식된 내부의 화려함도 상상을 초월한다.

파리 중심의 시테섬에 위치한 노트르담 대성당은 프랑스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곳 중 하나다. 그러나 그들 중 누가 이곳에서 벌어졌던 참혹한 결혼식을 기억할까. 역사의 비극이 성당의 아름다움에 묻히는 곳이다.

나폴레옹이 자신의 황제 대관식 장소로 이곳을 선택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성당은 여러 차례 왕가의 결혼식 장소로도 애용됐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결혼식이 바로 1572년 8월 18일의 '피의 결혼식'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결혼식은 성당 안이 아닌 성당 앞마당 광장에서 열렸다. 신랑과 신부의 종교가 달랐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이상한 결혼이 성사됐을까? 어떻게 왕가의 결혼이란 축제가 프랑스 역사상 가장 비참한 대학살로 이어졌을까? 원인은 종교전쟁에 있었다. 참된 신앙의 이름으로 피로 물든 山河

16세기에 유럽은 종교 때문에 분열됐고 다퉜다. 15세기에 절정을 이룬 교황청의 부패와 무능은 여러 국가와 다양한 계층의 반발을 샀다.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독일에서 행해진 조직적인 면벌부 판매는 특히 증오의 대상이 됐고, 마르틴 루터(Luther·1483~1546)의 '95개조 반박문'(1517년)으로 파국을 맞았다. 교황으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교회가 생겼고 이 교회는 순식간에 유럽 전역으로 번졌다. 신앙의 분열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이어졌다.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더 심했다. 종교 간 분쟁에 부르봉, 기즈, 몽모랑시 등 대(大)귀족 가문들 간의 권력 싸움, 권력 집중을 추구하는 중앙 정부와 자치를 원하는 지방 세력 간의 다툼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1562년부터 양측은 전쟁에 돌입했다. 당시 프랑스의 권력자는 카트린이었다.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 출신인 모후(母后·왕의 어머니) 카트린은 급사한 남편이 남긴 분열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딸과 신교도의 수장인 앙리 드 나바르와의 결혼을 추진했다. 그는 프랑스의 왕족으로 강력한 부르봉 공작 가문의 수장이며 남프랑스의 작은 왕국 나바르의 왕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아들인 샤를 9세에 대한 콜리니 제독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진 데 있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오만한 귀족들 틈에서 자랐던 왕은 강직하고 단호한 콜리니에게서 아버지와 보호자의 이미지를 함께 느꼈다. 모후는 권력 상실에 대한 위기감, 콜리니에 대한 질투, 아들에 대한 배신감으로 치를 떨었다. 고뇌 끝에 모후는 콜리니를 제거하기로 하고 암살을 사주했다. 암살이 실패로 끝나면서 사태는 파국을 향했다. 분노한 왕은 암살과 관련된 모든 이를 색출해 법정에 세우겠다고 맹세했다. 모후는 승부수를 던졌다. 왕 앞에서 진실을 밝힌 것이다. "어머니가 왜요?"라고 절규하는 아들에게 모후는 맞받아쳤다. "왜냐하면 이 왕국을 몰락시킨 무능한 왕을 낳은 사람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샤를 9세는 무너졌다. '모두 죽여'라는 단말마는 이때 터져 나왔다.

평화를 위해 선택한 개종과 관용

시테섬의 앙리4세 기마상.

파리의 신교도 대부분이 죽음을 맞았지만 새신랑 앙리 드 나바르는 살아남았다. 그는 신성(神聖)한 프랑스 왕의 핏줄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했다. 앙리는 살아남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가톨릭으로 종교를 바꾸고 연금 상태에서 불안한 삶을 이어가던 그는 신교도들의 도움으로 파리를 탈출했다. 대학살 후 프랑스의 내전은 더 격렬해졌다. 전투, 약탈, 무질서, 기근이 전국을 강타했다. 어느 진영도 물러서지 않았다. 1589년 앙리 드 나바르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발루아(Valois) 왕가의 마지막 왕인 앙리 3세(Henri Ⅲ)가 후사(後嗣·대를 잇는 자식) 없이 사망한 것이다. 앙리 3세의 뒤를 이어 가장 가까운 혈족인 앙리 드 나바르가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 교도인 프랑스에서 신교도 국왕이 설 자리는 없었다.

탁월한 정치 감각의 소유자였던 앙리 4세는 누구보다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선택해야 했다.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온 나라를 피로 물들일 것이냐, 아니면 왕국 전체를 위해 자신의 신앙을 포기할 것이냐?

앙리 4세는 정통성을 갖춘 국왕인 동시에 막강한 군사력과 탁월한 리더십까지 갖추고 있었다. 무력으로 가톨릭을 굴복시키고 내전을 끝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앙리 4세는 나라를 위해 자신의 신앙을 포기했다. 파리도 용서했다.

20여 년 전 사랑하는 친구와 동지들을 자신이 보는 앞에서 무참하게 학살한 사람들을! 정통성을 갖춘 자신을 끝까지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도시를! 맺힌 한(恨)의 크기는 컸지만 왕은 프랑스가 더 이상 전쟁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은 종교를 바꿨지만 신교도들에게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 줬다. 낭트의 칙령(1598년)이다.

그렇게 전쟁은 끝났다. 평화가 찾아왔고 재건이 시작됐다. 내전으로 찢겼던 프랑스는 10년 만에 다시 유럽의 강국으로 거듭났다. 앙리 4세를 프랑스 사람들은 지금도 사랑한다. 그의 선택이 나라를 구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그를 인정한다. 조국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 때문이다. 앙리 4세가 결혼식을 올렸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서쪽으로 시테섬을 따라 십 여분을 걸어가면 유명한 퐁뇌프 다리가 나온다. 그 다리 앞에 당당한 앙리 4세의 기마상이 서 있다. 멋진 곳이다! 이곳에서는 고결한 정신을 갖췄고, 역사에 왕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발자취를 남긴 극히 드문 리더를 만날 수 있다. 기마상 너머로 눈길을 돌리면 센강을 따라 줄지어 선 멋진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파리는 이렇듯 아름답다. 만약 앙리 4세와 같은 위대한 리더를 만나지 못했다면? 파리가 지금처럼 아름답지는 않았을 것이다.

왕좌의 게임·여왕 마고… 피의 결혼식, 미드·영화 단골 소재로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 포스터(왼쪽)와 영화‘여왕 마고’ 포스터(오른쪽).

앙리 4세와 마르그리트, 일명 마고의 결혼식은 영화와 미국 드라마의 소재로 자주 쓰였다. '여왕 마고(Queen Margot, 1994년)'가 대표적인 영화다. 프랑스의 대표 여배우 이자벨 아자니가 샤를 9세의 여동생 마고로, 다니엘 오테유가 앙리 드 나바르 역을 맡았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 장면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미국의 인기 드라마 ‘왕좌의 게임’ 시즌 3, 9편에도 피의 결혼식이 등장한다. 북부의 왕 롭 스타크와 왕비, 그리고 그의 지지자들이 친척의 결혼식에 초대받은 상태에서 무차별적으로 살해당하고 만 것이다. 마치 앙리 4세의 지지자들이 당했던 것처럼. 이 두 작품을 보고 나면 이런 비극을 겪고도 적에게 관용을 베푼 앙리 4세의 위대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