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울 수 있을 때 앉지마라… 나는 '침대형 인간'

조선일보
  • 표태준 기자
    입력 2018.06.07 03:01

    혼자 살아서, 집이 좁아서… 일도 누워서 밥도 침대에서 해결
    굴절 안경·링거처럼 생긴 빨대도 "주말에라도 최대한 에너지 충전"

    "에너지 보존이지. 앉을 수 있을 때 절대 서지 않고, 누울 수 있을 때 절대 앉지 않는 거란다."

    '윈스턴 처칠의 뜨거운 승리'를 쓴 역사학자 폴 존슨이 처칠에게 성공 비결을 묻자 돌아온 답이다. 처칠은 영국 총리 시절 오전 7시부터 정오까지 누워서 업무를 봤다. '똑똑하고 게으른 리더'란 평이 꼬리표로 붙을 정도였다.

    처칠처럼 침대에서 일하고 놀고 먹는 '침대족'이 늘고 있다. 대구에 사는 프리랜서 작가 김소희(51)씨는 침대에서 일한다. 김씨는 "직장 생활 10년 넘게 하며 얻은 허리·목 디스크 때문에 누워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효율적이었다"며 "통증 참아가며 앉아 일하는 것보다 훨씬 집중도 잘되고, 피곤할 때 누워서 멍 때리다 보면 기발한 아이디어도 잘 떠오른다"고 했다. 지난 4월 김씨는 각도 조절이 되는 전동침대를 구입한 뒤 천장 가까운 벽에 모니터를 달았다. 머리맡에 필기도구와 책을 놓고, 침대에 스마트폰과 리모컨 주머니까지 달아 침실을 업무 공간으로 만들었다.

    ‘침대족’ 김소희씨는 각도 조절이 되는 전동침대에 누워 일을 하고 책도 읽는다. 벽에 높게 달아놓은 모니터가 TV도 되고 컴퓨터 모니터 역할도 한다. 김씨는 “디스크 때문에 누워서 일해보니 생각보다 효율적이었다”고 했다.
    ‘침대족’ 김소희씨는 각도 조절이 되는 전동침대에 누워 일을 하고 책도 읽는다. 벽에 높게 달아놓은 모니터가 TV도 되고 컴퓨터 모니터 역할도 한다. 김씨는 “디스크 때문에 누워서 일해보니 생각보다 효율적이었다”고 했다. /남강호 기자

    좁은 원룸에 사는 1인 가구 증가도 침대족 등장의 배경이다. 서울 마포구에 사는 직장인 최정현(32)씨는 "5평짜리 좁은 원룸에 살다 보니 큰 가구 둘 공간이 없어 자연스레 놀고 공부하고 먹는 일을 침대에서 해결하게 된다"며 "침대가 곧 소파이자 책상이고, 식탁"이라고 했다. 경남 창원에 사는 은행원 최완우(30)씨는 피로 때문에 주말이면 최대한 침대 밖을 나서지 않는다. 최씨는 "잦은 야근 때문에 주말이면 에너지가 방전돼 몸을 쓰기가 싫다"며 "스마트폰만 있으면 누워서 영화 보고 게임하고 친구와 대화도 할 수 있는데 굳이 움직일 필요가 없다"고 했다.

    침대에서 뭔가 하는 것이 더 익숙해진 시대, 인스타그램에 '침대에서'를 검색하면 침대에서 무슨 일인가 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만 1만4000개가량 나온다. '책상에서'(814개), '소파에서'(1166개), '부엌에서'(1449개), '거실에서'(6799개)보다 훨씬 많다. 침대족 트렌드는 대중문화 콘텐츠에도 속속 반영돼 누운 상태에서 방송을 진행하는 '눕방'이 인기다.

    주사제처럼 음료수를 높이 달아 누워서 마실 수 있는 ‘링거 스트로’도 등장했다.
    주사제처럼 음료수를 높이 달아 누워서 마실 수 있는 ‘링거 스트로’도 등장했다. /빙그레

    침대족을 위한 기발한 상품도 쏟아지고 있다. 주로 거동 불편한 환자들이 병실에서 쓰는 '베드 트레이(bed tray)'는 침대족의 필수품.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를 누워서 볼 수 있는 침대용 스마트폰 거치대, 똑바로 누워 얼굴을 천장 쪽으로 향해도 TV가 보이도록 굴절 렌즈를 장착한 '굴절 안경'도 인기 상품이다. 심지어 침대에 누워 음료수를 마실 수 있는 제품도 나왔다. 병실 링거처럼 머리맡 거치대에 음료수 병을 걸어 두고 가늘고 기다란 호스를 빨대처럼 이용해 음료를 마실 수 있는 '링거 스트로'다. 이 제품을 개발한 빙그레 관계자는 "제품 홍보용 이벤트 제품으로 만들었는데 20~30대 사이에서 편리한 아이템으로 소문나며 2만 개나 팔려 나갔다"고 했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노동시간이 늘고 사회적 기대감에 자신을 맞춰 사는 피로사회가 도래하며 번아웃(burnout·소진) 상태에 시달리는 이들이 최대한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침대에 달라붙어 살고 있다"며 "게으르게 살기 어려운 시대에 주말에라도 게으르게 살면서 이를 공유하고 쾌감을 느끼는 '폐인 문화'의 일종이기도 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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