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 성폭행당했는데 꽃뱀이라고? 성폭행 피해자가 직접 파헤친 블랙박스

  • 디지털편집국 문화부
    입력 2018.06.08 06:00

    블랙박스
    이토 시오리 지음, 김수현 옮김|미메시스|284쪽|1만4500원

    “성폭력은 그 누구도 경험하고 싶지 않은 공포와 고통을 낳는다. 그리고 그것은 오랫동안 그 사람을 괴롭게 한다. 왜 내가 강간을 당했을까?”

    ‘블랙박스’는 일본의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인 이토 시오리가 자신의 성폭행 피해 사실과 이후 일본 사회의 반응을 가감 없이 기록한 논픽션이다. 이토 시오리는 2017년 5월, 일본의 사법 기자 클럽에서 기자 회견을 열고 공개적으로 자신의 성폭행 피해 사실을 폭로했다. 성폭력 문제에 폐쇄적인 일본에서 피해자가 얼굴을 보이고 실명으로 기자 회견을 연 것은 처음이었다.

    2015년 4월 3일, 당시 로이터 저팬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그녀는 뉴욕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던 시절 알았던 야마구치 노리유키 TBS 워싱턴 지국장을 도쿄에서 만났다. TBS 워싱턴 지국에서 프로듀서로 일할 기회를 제안한 야마구치에게 비자와 처우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2차 술자리에서 기억을 잃고 만다. 정신이 돌아왔을 땐 자신의 몸 위에 야마구치가 있었다.

    “왜 내가 강간을 당했을까?” 그녀는 몇 번이나 자신을 나무랐다. 야마구치 지국장을 신고하기 위해 경찰서에 찾아갔지만 “자주 있는 일이라 수사하기 어렵다”는 답변을 들었고,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나 반복한 끝에 야마구치를 신고했다. 우여곡절 끝에 담당 수사관은 초밥 가게를 탐문 수사하고 사건 당일 두 사람을 태웠던 택시 운전사의 증언을 따며 증거를 모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체포 당일 경시청 상부의 제동으로 체포가 중지되고 수사관과 검사도 바뀌었다. ‘사회적 지위가 있고 증거 인멸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구속 영장조차 나오지 않았던 야마구치는 결국 불기소 결정을 받았다.

    책의 제목인 ‘블랙박스’는 사건 담당 검사가 “이 사건은 제삼자가 알 수 없는 밀실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말한 데서 따왔다. 사건이 있고 불기소 결과가 나오기까지 1년 4개월간 그녀는 제대로 일할 수가 없었다. 성폭행 후유증으로 무릎을 많이 다쳐 여전히 몸이 온전하지 못하고, 정신도 피폐해졌다. 하지만 가해자인 야마구치는 TBS를 그만두고 바로 아베 총리에 관해 쓴 ‘총리’라는 책으로 정치부 스타 기자가 되고, 주변에서는 현 정부의 고위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반면 권력에 앞서 진실을 알린 그녀에게는 “꽃뱀이다, 야당의 정치 조작이다, 북한 공작원이다” 등의 2차 가해가 일어났다. 현재 그녀는 2차 피해로 인해 더 이상 일본 언론사에서 일하기 어려워 영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그녀가 책을 쓴 이유도 이런 현실을 알리기 위해서다. 그녀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언론은 성폭력을 다루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더 강해져야 한다고 느낀다. 그리고 왜 이것이 OK가 아닌지 계속 이야기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토 시오리는 성폭행을 당하고도 대책을 세울 수 없는 현실에서 차분하게 대응책을 알려주며, 나아가 피해자 입장에서 꼭 필요한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성폭력에 관한 사회적 제도와 법적 시스템을 동시에 바꾸려면 우선 피해에 대해 오픈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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