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文 대통령의 '김정은 체제' 걱정

입력 2018.06.02 03:15

北, 극소수 기득권 지키기 위해 反인권·反시대적 경제 유지
인민 봉기로 北 체제 흔들리면 '人權 중시' 文 정부는 막을 건가

이동훈 디지털편집국 정치부장
이동훈 디지털편집국 정치부장
기자가 대학에 다니던 1989년 북한에서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열렸다. "햇볕은 넘치어라, 평양 하늘에…"로 시작하는 축전 노래가 그해 한국 대학가를 뒤덮었다. 몰락하는 북한은 서울올림픽 맞대응 차원에서 세계청년학생축전에 90억달러를 쏟아붓는 오기(傲氣)를 부렸다.

남한의 군사 독재, 재벌 세습엔 치를 떨면서도 북한 세습 독재엔 관대했던 운동권 선배들은 열정적으로 북한을 응원했지만 표정에선 서늘한 걱정을 감출 수 없었다. 임종석 전대협 의장이 북한에 임수경을 보낸 게 그해 7월이었다.

축전 과시용(用)으로 시작된 105층짜리 류경호텔 공사는 마무리되지 못했다. 뒤늦은 오기나 철없는 열정이 사회주의 모순에 따른 몰락을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뒷날 드러났지만 세계청년학생축전은 북한 추락의 속도를 높인 촉매 노릇만 했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소련 등 여러 사회주의 국가들이 인민을 살리기 위해 체제를 포기했지만 북한은 체제를 지키기 위해 인민을 굶겼다. 33만명이 아사(餓死)했다는 통계가 있었다. 국제 제재를 감수하고 핵무기를 만들었다.

"북한이 봉건 왕조에서 노예 사회로 후퇴한 시기"라고 태영호 전 주영 북한 공사는 증언했다. 한국 좌파 정부의 도움도 추락하는 북한의 날개가 되어주지 못했다. 배급 시스템이 무너지면서 시장(장마당)이 제한적으로 허용됐고, 확산했다. 1984년생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이런 북한을 보고 자랐다. 전문가들은 김정은이 핵무기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협상에 나선 이유를 '북한 경제 70~80%를 장악한 장마당의 압박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지난 26일 김정은을 만나고 돌아온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가 비핵화하면 미국이 적대 관계를 종식하고 체제 안전을 보장한다는데 신뢰할 수 있느냐'는 김정은의 우려를 전했다. 그러면서 북한 체제 안정 보장을 위해 미국과의 중재역을 맡겠다고 했다. 문 대통령에게서 김정은과 북한을 걱정하는 심정이 느껴졌고, 과거 운동권 대학생들이 품었을 법한 열정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그러나 북한 체제를 걱정하는 문 대통령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어디까지 보장하겠다는 건가. 미국의 군사 공격으로부터의 보호? 상호 불가침? 이런 거라면 도와줄 수 있겠다.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아야 하는 우리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내부 모순으로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체제 문제라면 다른 얘기다. 우리가 김정은 체제 안전을 보장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카다피의 최후를 아는 북한은 '리비아' 얘기만 나오면 과민 반응하지만, 카다피를 죽인 것은 미군이 아닌 반란군의 총탄이었음을 북한도 안다. '김정은 체제 보장'은 카다피처럼 인민 손에 죽지 않게 해달라는 얘기인가. 인민이 봉기하면 미국이 막아줘야 하나.

북한 정권은 이른바 백두 혈통을 중심으로 한 소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유례없는 반인권 정책을 펼치며 반(反)시대적 폐쇄 경제를 유지했다. 다수를 기만하며 반역사적인 노예 사회를 유지해온 정권이 갑자기 개혁·개방에 나설 가능성에 대해 전문가들은 회의적이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로 개혁·개방을 이뤄낸 중국·베트남과도 다르다. 이런 북한 체제의 안전을 국제사회가 보장해줄 방법은 없다.

북한에 대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체제 보장이라고? 트럼프 대통령 아니라 하느님이 와도 그건 못 한다. 해서도 안 된다. 입버릇처럼 민의와 인권을 말해온 운동권이 주축인 문재인 정권도 마찬가지다. 김정은 체제 보장은 미국이나 남한이 아닌 북한 인민 손에 달린 일이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