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가 흔들리고 있다. 최고 법원인 대법원 판결에 대한 불복 움직임까지 번지고 있다.

지난 25일 대법원 특별조사단이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KTX 승무원 판결' '전교조 법외(法外)노조 판결' 등을 활용해 청와대와 거래를 시도하려는 문건을 만들었다"고 밝히면서다.

29일 KTX 해고 승무원 등 10여 명은 서울 서초동 대법원의 대법정을 10분가량 무단 점거했다. 처음 있는 일이다. 이들은 "양 전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은 사법 정의를 쓰레기통에 내던졌다"며 "양 전 대법원장을 구속하라"고 했다. 전교조도 기자회견을 열고 "양승태 대법원의 전교조 법외노조 판결은 원천 무효"라고 했다.

KTX 해고 승무원, 대법원 본관 진입 시도 -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로비에서 KTX 해고 승무원들이 김명수 대법원장 면담을 요구하며 본관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이날 KTX 해고 승무원들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KTX 승무원 재판을 활용해 상고법원 설치 건을 정부와 협상하려 했다는 의혹이 나오자 이에 반발해 대법원을 기습 점거하고 항의 시위를 열었다.

한국철도공사(코레일) 자회사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해고된 KTX 승무원들은 2008년 코레일을 상대로 "직접 고용하라"는 소송을 내 1·2심에서 승소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2015년 "여승무원과 코레일 간 직접적인 근로관계가 있다고 볼 수 없다"며 패소 판결을 했다. 그런데 해고 승무원들은 조사단이 공개한 문건을 근거로 "대법원 판결은 무효"라고 주장한 것이다. 전교조도 이 문건을 근거로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행위는 재판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법조계 인사들은 우려했다.

이들의 주장이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특조단 관계자는 "애초 그런 의도를 갖고 판결이 나온 게 아니라 판결 후에 행정처 차원에서 거래를 시도하려 한 아이디어 차원이었다"며 "문건 내용은 실행되지 않았다"고 했다. 행정처가 재판에 영향을 미친 정황은 없다는 것이다. 특조단이 이 사안을 형사적으로 문제 삼기 어렵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도 문건에 등장한 판결 당사자들은 '거래가 있었다'고 단정하고 이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문건에는 내란 선동 혐의를 받았던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에 대한 유죄 판결, 긴급조치 사건에서 국가배상을 제한한 판결 등도 등장한다. 이 때문에 통진당 대책위원회, 긴급조치 피해자모임 등도 30일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계획하는 등 단체행동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특조단 발표가 판결 불신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한변호사협회도 성명을 내고 "철저한 수사와 진상 규명, 실효적인 방지 대책을 마련하라"고 했다.

법원 안팎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황병하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이날 법원 내부 통신망에 올린 글에서 "판결을 공격할 때는 분명한 근거와 뚜렷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며 "행정처 요원(판사)이 남의 판결을 가지고 이상한 행동을 했다고 그 재판이나 판결이 쉽사리 무시될 수는 없다"고 했다. "(현재 진행 중인 사태는) 사법의 본질에 맞지 않고 그래서는 판사가 소신 있는 재판을 할 수 없다"고도 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도 "이런 식이라면 과거 재판 결과에 불만을 품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 응대할 것이냐"며 "앞으로 재판을 어떻게 할지 걱정이다. 당사자들이 재판의 정당성을 모조리 의심할 것"이라고 했다.

허영 경희대 석좌교수는 "판결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어도 이런 식으로 해결하려 한 전례가 없었다"며 "앞으로 어떤 재판을 국민이 믿겠느냐. 사법부가 자초한 일"이라고 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구성한 특조단이 전임 대법원장 시절 일을 조사하면서 문건에 등장한 내용을 여과 없이 공개해 판결이 마치 거래 대상이었던 것처럼 불필요한 의혹을 증폭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