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The Column] '386 코드 정치'… 國亡 초래한 조선시대 도덕 정치

조선일보
  •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입력 2018.05.29 03:17


실용·실질로 한반도에서 가장 성공한 大韓民國
평화·정의·自主 같은 낙관적 정치 언어로 안보·경제 불안을 감출 수가 있을까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집권 2년 차 초입의 문재인 정부는 유례없는 자축(自祝) 분위기다. '문재인 정부 1년, 국민께 보고 드립니다'라는 제목의 평가집에 따르면 무엇보다 '판문점 선언' 이후 한반도의 영구 평화가 눈앞에 다가왔다. 모든 사람이 더불어 잘 살게 될 시대도 얼마 남지 않았다. '촛불 민주주의' 덕분에 국민은 나라의 주인 자리를 온전히 되찾았다고 한다. 불과 1~2년 사이에 우리는 전혀 딴 세상에 살게 된 느낌이다.

그래서일까, 대통령 지지율은 고공(高空) 행진을 지속하고, 다음 달 지방선거에서 여당은 압승을 기대하고 있다. 급격히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 비판 세력은 존재감과 자신감을 모두 잃었고, 보수·진보 사이에 제대로 된 남남(南南) 갈등이랄 것도 더 이상 없다. 하지만 지금은 우파의 궤멸을 안타까워할 때가 아니다. '좌파 천지' 혹은 '진보 천하' 속에 대한민국 자체가 지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대한민국이 자신을 뿌리째 흔드는 임자를 이번에 제대로 만난 것이다.

현 정부는 대한민국 건국년(建國年)을 둘러싼 학계의 오랜 논쟁에 기습적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1919년 건국설의 정치적 판정승에 따라 1948년 전후 건국 과정은 그 의미가 상대적으로 격하될 전망이다. 새로 마련된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은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 합법 정부라는 사실도 부정했다. 또한 대한민국의 국가 이념은 더 이상 '자유민주주의'가 아니어도 무방하게 되었다. 이러다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대한민국은 껍데기만 남을 판이다.

언필칭 분단국가, 독재국가, 종속국가, 폭력국가가 대한민국의 총체적 진실은 아니다. 크고 작은 흠결이 있어도 대한민국은 한반도 역사상 가장 성공한 근대국가다. 대한민국은 나라를 세우고, 지키고, 키울 줄 알았던 국가 건설 '방법론'의 소유자들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방법인'(方法人)으로서 이승만과 박정희는 막연한 이상 대신 구체적 현실을 직시했고, 추상적 관념 대신 실천적 전략에 능통했다. 누가 뭐래도 단정(單政) 수립과 한·미 동맹,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은 대한민국의 밑그림이자 밑거름이다.

방법론을 앞세운 리더십은 한국사에서 결코 흔치 않았다. 특히 조선시대 이후 한국 정치의 본색은 도덕 정치, 관념 정치, 사변(思辨) 정치에 훨씬 가까웠다. 개국 200년 만에 조선조의 적폐 청산을 절규했던 율곡(栗谷) 역시 당위와 원론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임진왜란에 따른 국가의 존망 위기를 극복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류성룡(柳成龍) 덕분이었는데,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한 실질적 방법과 실용적 정책에 정통했다는 점에서 그는 실로 예외적 인물이었다(송복,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

하지만 국난이 끝나면서 조선은 '방법론의 정치'와 다시 결별했다. 류성룡은 '국정 전단(專斷)' '권세 희롱' '부정부패' 등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익숙한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류성룡 이후 조선은 윤리의 세계와 이데올로기의 정치로 유턴했고, 궁극적으로 국망(國亡)의 비극으로 직진했다. 그리고 이러한 근본주의 유령은 현대 한국 정치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 적폐 청산은 언제나 준비된 칼날이고, 권력 농단은 아무나 향할 수 있는 창끝이다.

특히 문재인 정부 1년에서 조선조 도덕 정치의 데자뷔(deja-vu)를 경험한다. 닫힌 세계관에 안주한 채 가치와 정신세계를 중시하고 말솜씨와 보여주기에 치중하는 '386 코드 정치'는 방법론 부재라는 측면에서 우리 시대의 주자학(朱子學)이다. 평화나 정의(正義), 자주(自主)와 같은 희망적 낙관과 주관적 환상이 당장에는 정권의 인기에 거품을 일구겠지만, 밑바닥 안보 불안과 무너지는 경제 그리고 떠나는 민심을 끝내 감출 수는 없다.

교토대 오구라 기조(小倉紀藏) 교수에 의하면 "한국사회는 화려한 도덕 쟁탈전을 벌이는 하나의 거대한 극장"이다. 도덕을 통해 집권하고 부도덕을 이유로 모든 것을 잃는 정치 문화라는 의미다. 하긴 작금의 적폐 청산 드라이브 와중에 문재인 정부를 겨냥한 도덕 정치의 역습은 이미 시작되었다. '댓글 조작' 사건이 그 전조(前兆)다. 이 정권이 그나마 성공하려면 한국 현대사를 꽃피운 방법론의 정치를 배척할 것이 아니라 존중하고 계승해야 한다. 도돌이표 도덕 정치의 악순환을 청산하는 게 진정한 진보의 뜻이자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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