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남긴 靑春의 흔적은 무엇입니까

조선일보
  • 변희원 기자
    입력 2018.05.25 03:00

    '희망낙서'展 여는 화가 사석원, 동물로 은유한 젊음의 초상 그려
    "실망과 좌절의 연속이었던 청춘… 그래서 더 강한 동물로 형상화해"
    가나아트센터서 내달 10일까지

    여든이 넘은 아버지가 인공호흡기를 낀 채 병상에 누워 있다. 아들 얼굴도 못 알아본다. 아버지를 보면서 곧 예순이 될 아들은 자신이 점점 쇠락하고 소멸해가는 걸 느낀다. '나의 현재는 어디까지 계속될까.' 그때 청춘이 떠올랐다. "에너지가 충만했던 시기의 청춘에게 물어본 것을 그림으로 풀어냈습니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사석원(58)의 '희망낙서'는 고궁, 산속, 아프리카 등 공간을 주제로 그렸던 예전 작품들과 달리 자신의 내면을 드러낸 전시다. 40여점 신작을 '출범' '희망낙서' '신세계' 등 총 3부로 구성했다.

    전시는 청춘이 공식적으로 끝나는 가장(家長)의 시점에서 출발한다. 1부 '출범'에 나온 고릴라는 비장하지만 처연할 수밖에 없는 가장이다. 토끼, 양, 염소 등을 껴안고 곡예까지 부리면서 풍랑을 헤치고 나간다. 동물을 좋아해 '동물 화가'로도 불리는 작가는 "사람보다 더 순수하고 깊은 고릴라의 눈빛에 반했다. 과천 동물원을 비롯해 일본, 프랑스 등 각국의 동물원을 다니며 고릴라를 관찰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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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이 된 부엉이’(왼쪽)와 ‘코뿔소’ 사이에 선 화가 사석원. 그는 “미약하고 힘들었던 청춘 때 동경했던 동물을 그렸다”고 했다. 이 동물들은 여느 청춘처럼 기운이 넘치고 찬란하다. /고운호 기자

    전시장 2층의 '희망낙서'에 들어서야 색동 같은 원색으로 화려하게 단장한 청춘이 모습을 드러낸다. 작가는 물감을 캔버스에 바로 짜내 육질(肉質)과 같은 마티에르를 표현하는 것으로 잘 알려졌다. 이번에는 작업 방식을 바꿔 물감을 칠한 뒤 나무로 밀어서 지우고 그 위에 덧칠을 했다. 세월을 걷어내듯 물감을 밀어버리자 맑고 가볍지만, 약간은 바랜 듯한 청춘이 나타난다. 사석원은 "지운다고 해서 다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흔적이 남는다. 그것을 발판으로 또 다른 시도를 하면서 희망을 표현했다. 잡고 있는 것을 놓고, 계속 쌓아온 것을 덜어내고 싶었다. 놓는 연습도 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선 유독 호랑이, 사자, 부엉이, 코뿔소, 소처럼 강한 힘을 가진 동물들이 눈에 띈다. 작가는 스스로를 "공부를 못했고, 싸움도 못해서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다고 회상했다. 강한 남성성이나 영웅을 동경했던 자신의 청춘을 동물로 형상화했다. 특히 무협지와 이소룡의 권법 영화에 한창 빠져 있을 무렵이라 태극권이나 영춘권 자세를 취한 부엉이와 호랑이도 있다. 그는 "남다른 고난이나 특별한 사건 없이도 청춘은 실망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돌파력과 생명력을 가진 강한 존재에 더 끌렸다"고 했다.

    사석원 전작(前作)에 익숙한 관람객이라면 마지막 '신세계'에서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다. 그가 호랑이와 여성의 누드를 함께 그렸다. 사석원 그림에서 사람을, 그것도 전라(全裸)의 사람을 보는 것은 의외이지만, '청춘'이라면 수긍이 간다. 욕정 없는 청춘은 위선. 작가는 이런 글을 남겼다. "성적 욕망으로 가득 찬 내 몸뚱어리, 불안과 불온, 허기와 갈증으로 가득한 청춘 시절이었다. 밤마다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와 윤시내의 '열애'를 웅얼거리는 나의 스무 살 청춘은 취했고 늘 숙취에 시달렸다."

    '희망 낙서'와 '신세계' 사이에 걸린 '눈보라'는 원색의 붓질로 현란한 전시장에서 홀로 담백해 눈에 띈다. 사슴 떼가 눈보라를 헤치고 뛰어가는데, 머리에 뿔이 없으니 이들은 청춘이다. 사석원의 지인이 지어준 그의 호는 '영소(永少)'. 영원히 소년 같을 것이고, 또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었을 것이다. 다시 청춘으로 돌아가고 싶으냐 물었더니 "아니다.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그는 사슴 같은 청춘들이 눈보라 같은 고난을 무사히 헤쳐나가길 희망했을 것이다. 6월 10일까지. (02)720-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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