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m 두루마리 그림책에 담은 땅 밑 세계 보실래요?"

조선일보
  • 김경은 기자
    입력 2018.05.22 03:01

    첫 작품 '나무…'로 라가치상 수상 "다음 작품은 슬픈 결말 그림책"

    5년 전 어느 날. "산책을 나갔다가 보도블록 한구석에서 밑동만 남고 뎅강 잘린 나무를 봤어요. 우리나라에선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인데, 그날따라 심장이 터질 듯 쿵쾅댔지요. 밑동 아래로 보이지 않는 뿌리가 떠오르면서 땅 밑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한층 생명력 넘치는 거대한 세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나무, 춤춘다’를 길게 펼친 배유정.
    ‘나무, 춤춘다’를 길게 펼친 배유정. 어떻게 읽어야 하느냐 물으니“마음 가는 대로요. 저는 책을 쭉 펼쳐놓고 옆에서 따라 걸으며 읽어요”라고 했다. /성형주 기자
    지난 3월 말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열린 2018 국제아동도서전에서 그림책 작가 배유정(38)은 자신이 쓰고 그린 그림책 '나무, 춤춘다'(반달)로 라가치상 뉴호라이즌 부문 대상을 받았다. 라가치상은 해마다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 출품된 그림책 중 작품성이 가장 뛰어난 것에 주는 그림책의 노벨상. 경희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일러스트레이터로 남의 책에 삽화나 무대 배경 등을 그려주는 일을 했던 그는 생애 첫 작품으로 라가치상을 거머쥐는 쾌거를 이뤘다.

    바람 부는 봄날,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배유정은 "볼로냐에서 바닥에 내 책을 펼치면 사람들이 '호오~!' 하며 몰려와 책을 사 갔다. 가지고 간 책은 현장에서 모두 팔렸다"며 싱긋 웃었다. 그럴 만했다. 판형부터 남달리 길쭉한 '나무…'는 낱장 열여섯 개를 하나로 길게 이어 붙여 펼치면 길이만 15m에 달하는 특이한 그림책. 앙상한 나무가 밑동만 드러낸 가운데, 뿌리 같기도 줄기 같기도 한 그림들이 아래로 끝없이 흐른다.

    이 책 만드는 데 5년이 걸렸다. 시작은 몸속 오장육부였다. 2008년 즈음 '내 몸은 악기'라는 책에 삽화를 그리면서 아이디어가 떠올랐죠." 꺼억 트림하는 소리, 꾸르릉 배 속에서 나는 소리, 뽀옹 방귀 뀌는 소리 등 우리 몸에서 나는 여러 소리를 악기에 빗대어 경쾌하게 풀어내는 내용이었다. "손금은 산맥과 닮았고, 핏줄은 나무뿌리 같고, 눈동자는 우주의 행성과 비슷하단 생각을 하게 됐죠. 그러다 밑동만 남은 나무를 본 순간, 어디든 뻗어나가 또 다른 생명체와 자연스럽게 만나는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 거예요."

    자연의 섬세한 느낌을 살리려 한 번만 찍어낼 수 있는 판화 기법인 모노프린트로 작업했다. 구불구불 춤추는 뿌리의 움직임은 물감 대신 강렬한 페인트마카로 표현했다. 낱장은 일일이 손으로 이어 붙였다. 초판 1000부를 찍어 서점에 내놨다. 아동도서 분야가 아닌 예술서적 코너에 놓였다. 한번은 서점에 갔다가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무…'의 튀어나온 모서리를 건드리는 바람에 책더미가 와르르 무너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민망했다. '난 왜 이렇게 불편한 책을 냈을까.' 친구가 말했다. "불편하면 좀 어때? 재미있으면 되지." 라가치상을 받은 뒤 2000부를 더 찍었다.

    다음 작품의 주제는 '우리 삶의 불안'. "남편과 6개월간 남미를 여행하면서 밤 버스를 자주 탔어요. 몽롱한 기분으로 창밖 낯선 풍경들을 보며 틈날 때마다 스케치를 했지요. 근데 돌아와 보니 그림마다 절절한 불안이 녹아 있었어요. 엄마들은 해피엔딩만 바라는데, 저는 새드엔딩을 보여주는 그림책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눈물을 모르는 웃음이 어떻게 반짝반짝 빛날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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