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도박이자 은총… 매일의 시간을 극복해갈 뿐"
"17세에 호텔 벽지 앞에서 통곡… 앞으로 이게 내가 살아갈 인생"
"69세에 카네기홀 역사상 최초로 바흐 무반주 완주 꿈 이뤄"
6월 3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연주회, 가을엔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협연
“두려웠어요, 나는. 공포의 우산 속에서 살았지. 사회의 기대에, 부모님의 기대에 어긋날까, 그게 너무 무서웠고, 그래서 늘 겁에 질려 있었어. 17살 때 스승인 미스터 갈라미언 손에 이끌려 뉴욕에서 세계 최고 오케스트라와 무대에 섰어요. 무대에서 내려와서 알았지. 내가 어마어마한 걸 했다는 걸.”
칠순의 정경화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그때 호텔의 벽지가 기억난다고. “호텔에 와서 벽지를 보고 얼마나 슬피 울었던지. 그때 알았어요. ‘이게 앞으로 내가 살아갈 인생이구나!’”
정경화의 활이 허공에 한 줄의 선을 그을 때마다 나는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라는 어마어마한 구절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치곤 했다. 흑암을 깨는 명령 ‘빛이 있으라'와 ‘빛이 있었다'는 창조 사건 사이에 존재했을 알파와 오메가의 시간.
정경화의 무대는 사운드를 초월해 표정과 육체만으로도 전율이 전해졌다. 파르테논 신전처럼 버티고 선 몸, 떨리는 눈꺼풀과 주름진 미간, 견고한 턱과 입술, 어깨의 삼각지에서 우리는 그녀가 하늘 높이 쌓아 올리는 음표의 바벨탑을 목격하고 탄복했다.
힘차게 활의 노를 저어 브람스의 바다를 건너고, 모차르트의 들판을 지나 바흐의 산맥을 등반하는 동안 6살 천재 소녀는 70살 할머니가 되었다. 그 사이 얼굴엔 고운 주름이 내려앉았다. 2005년부터 2010년까지 활을 쥘 수 없는 부상의 시간도 보냈다.
다시 활을 쥔 노인은 지난 2년간 베이징에서 시작해 광저우, 상하이, 런던, 서울, 도쿄, 런던, 뉴욕을 돌며 바흐 소나타와 파르티타 6곡 전곡을 무반주로 연주했다. 손에 쥔 악기만으로 3시간 동안 거대한 소리를 건축해냈다. 125년 카네기홀 역사상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도전이었다.
65년간 ‘알파와 오메가’의 시간을 살았던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를 만나러 갔다. 지난봄에 내놓은 33번째 정규 앨범 ‘아름다운 저녁'을 기념해서, 6월 3일 롯데콘서트홀에서 리사이틀을 앞둔 채였다.
구기동 자택의 초인종을 누르자 가장 먼저 ‘요하네스’와 ‘클라라’가 요란한 발걸음으로 달려 나왔다. 아홉 살, 여덟 살 반의 강아지들은 암팡지게 짖었다. 무서우리만치 맹렬한 환대였다.
“요하네스! 클라라!” 정경화가 강아지를 가슴에 안고 함빡 웃었다. “이 아이들이 날 닮아 좀 예민해요. 짐작했겠지만 요하네스는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에서, 클라라는 브람스가 사랑했던 슈만 클라라에서 따왔어요.” 스테미너가 넘치는 명랑한 목소리가 실내에 울렸다.
-이곳엔 언제 정착하셨어요?
“2010년부터예요. 산밑이라 공기가 맑고 기운이 좋아요. 이곳에서 나는 건강이 다 회복됐어요. 미국에서는 의사 한번 보는 데도 몇 날 며칠이 걸리는데, 한국에서는 빨라.”
-국보급이시니까요(웃음).
“(손을 휘저으며)아녜요. 아무튼 한국에서 사랑을 참 많이 받아요. 내가 미국에는 61년에 가서 참 오래 살았어요. 참, 그런데 추워요? 아니면 더운가? 불편하면 방석에 기대서 앉아요. 차 줄까요? 과일은? 요하네스, 클라라! 얌전히! 하하. 내가 좀 예민해. 예민하죠.”
-평생을 예민한 성격으로 사셨어요. 눈꼬리 입꼬리가 팽팽히 당겨진 활 같은 표정을 하시고서(웃음).
“무대에 나가면 뒤통수에도 눈이 있어. 오케스트라 한 명 한 명하고 신경줄로 전부 연결이 된다니까. 좀 심각했지. 하하하. 그런데 실내악을 해도 그건 마찬가지야. 가벼운 적이 한 번도 없어. 하모니를 맞출 때 리듬이 다 연결돼 있다구. 소리는 다 즉흥적이야. 무대, 객석, 악기, 음향이 다 서로 연결돼서 연주가 나와요. 말도 못 해, 그 즉흥성이. 천만번 준비를 해도 모든 연주는 즉흥적일 수밖에 없어요.”
-6월 3일 롯데홀 공연 준비는 어떻게 돼갑니까?
"아주 흥미로운 연주가 될 것 같아요. 아직 음향 성격을 모르니까. 소리가 어떻게 부딪히고 공명하는지 그 컬러와 색채를 상상하는 즐거움이 커요."
물감이 캔버스를 적시며 빛과 물의 길을 만들어 내듯, 정경화의 현이 허공에 한 줄 선을 그을 때마다 공기의 텍스처는 다양하게 소리의 실핏줄을 만들어 낸다. 소리의 입자와 파동을 전달하는 음향은 연주자의 귀와 청중의 귀를 한 몸으로 잇는 예민한 신경줄일 터.
-과르니에리로 연주하시죠? 온도, 습도, 그날 객석의 체온과 탄성에도 반응하는 악기라고 알고 있어요.
“네. 이 과르니에리가 정말 예민해요. 인간보다 더하죠. 그래서 매번 신비로운 긴장감을 줘요. 그런데 또 예술에서 신비로움이 얼마나 중요해요. 그뿐인가. 프레시하기도 해야 해. 나이 칠십에 여전히 프레시라니. 아이고. 내가 미쳤어. 아하하.”
-칠순을 맞은 기분이 어떠세요?
“사실 별로 생각을 안 했는데 일주일 전부터 약간 기분이 이상했어요. 우울증인가 싶기도 하고. 생일 전날엔 가까운 사람들과 모여 단출하게 저녁만 먹었어요. 그런데 딱 칠십이 되는 날, 아침에 일어나니 너무 홀가분 한 거야. 아! 칠십이 되도 어제랑 오늘이 다르지 않구나!”
-소설가 박완서 선생도 똑같은 말을 하셨지요. 말할 수 없이 홀가분하다고.
“네. 홀가분해요. 칠십 세가 됐다고 갑자기 더 늙는 것도 아니죠. 인간은 사실 매일을 극복하는 게 힘들어요. 젊었을 때는 앞날을 바라보고 가죠. 40세, 50세가 지나면서 점점 앞날이 아니라 오늘이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돼요. 그다음엔 순간순간이 중요하다는 걸 알죠. 60세가 되면 그런 생각조차 안 해요. 70세엔 이 시간을 보람있게 보내야겠다는 욕심이나 부담이 없어져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자기 마음속으로는 세상을 보는 눈은 조금도 늙지 않았어요.”
-연주할 때 몸의 느낌은 어떠세요?
“이번에 브람스 콘체르토를 연주했는데, 물리적으로 완벽한 연주는 아니었어요. 젊었을 때는 그렇게 완벽했는데(웃음). 중요한 건 불완전한 내가 불만스럽지 않았다는 거예요. 이 이상 어떻게 더 해? 하하하. 젊었을 땐 부모, 나라, 스승을 위해서 안달하며 연주했는데, 지금은 나를 위해서 해요. 내가 6살 때 발견했던 최초의 신비… 그 소리의 색채, 마음속의 무지개를 좇아서 해요.
이번에 33번째 앨범을 내면서 가브리엘 포레와 세자르 프랑크의 곡을 연주했어요. 포레는 젊을 때 사랑에 빠져 그 작품을 썼고, 프랑크는 60대 중반에 썼어요. 그런데 프랑크의 곡은 젊을 땐 일부러 성숙하게 연주하려고 했지만, 지금은 자연스럽게 그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기브업은 안 할 겁니다.”
-기브업을 안 한다는 말이 상쾌하게 들리네요!
“하하하. 말로는 종종 ‘때려쳐야지’ 그래요. 그러면 왠지 속이 좀 시원해지거든(웃음).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식의 여유와 배짱이 있어야 더 즐겁게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아마 기브업은 안 할 겁니다. 하하.”
-현의 마녀, 암사자 같은 과거의 별명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하하. 인정해요. 어떻게든 쥐고 흔들어야 직성이 풀렸으니까요. 그때는 그랬어요.”
-손가락을 보호하기 위해 수영할 때도 장갑을 꼈다는 게 사실인가요?
“수영은 아니고 목욕할 때 그랬어요. 굳은살이 풀리면 안 되니까.”
그런데 2005년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손가락에 큰 상처를 입었다.
“가장 중요한 왼손 검지에 상처가 생겨서 코르티손(일종의 무통 주사)을 맞았는데 연결부위가 약해져서 완전히 꺾어졌어요. 5년 동안 재활을 했어요. 한국의 명의에게 수술도 받았어요.”
-바이올리니스트가 손가락에 칼을 댔다는 말인가요?
“네. 뼈에 구멍을 뚫고 수술을 했어요. 저는 제 외과 주치의를 100% 믿었어요. 그분도 그랬고요. 다른 연주자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에요(웃음). 나에겐 믿음의 은사가 있어요.”
정경화는 결과적으로 5년간 부상의 시간이 축복의 시간이었다고 했다. 5년 동안 줄리아드 음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녀는 악기가 아닌 머리로 연주하는 훈련을 했다. 아킬레스건이 끊어진 무용수와 같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머리로 연주를 한다는 게 무슨 말이죠?
“나는 연주 소리가 귀로 다 들려요. 머릿속 연주가 정확하게 나오죠. 내가 받은 축복입니다. 그때 바흐의 무반주를 연습했죠. 만약 악기를 쓸 수 있었다면 게을러서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도 안 했을 거야. 하하하. 바흐는 특히 하모니가 너무 까다로워. 그 복잡한 무반주와 파르티타 6개를 이 나이에 손으로 연습했다면 못했겠죠.”
그러니 신의 은총이 얼마나 놀라우냐고 그녀가 폭죽 같은 웃을 터뜨렸다. “나의 스승 갈라미언은 하루 14시간씩 지독하게 나를 연습시켰어요. 그분 말씀이 “못 견딜 정도로 힘들 때가 제일 잘 될 때다"였죠. 내 어머니도 늘 말씀하셨죠. “화가 복이 되니 힘들 때는 공부하라”고.”
-그러니까 선생의 말씀은 작년에 바흐 무반주를 완주할 수 있었던 건 그 끔찍한 부상과 뼈에 구멍을 뚫는 수술로 인해 머릿속으로 상상의 연주를 했기에 가능했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결국엔 제 꿈이 이뤄지기 위해 그런 시련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거죠.”
-모든 게 시간과 인내 그리고 믿음으로 이어지는 느낌입니다.
“맞습니다. 삶에서도 음악에서도 인내의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천재의 핵심은 재능이 아니라 인내심이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정색하며)어떻게 나를 천재라고 얘기해요? 엄마가 나를 신동이라고 한 적은 있어요. 그런데 천재는 아니야. 그냥 바이올린에 미친 거야. 6살 때부터 지금까지. 피아노를 배웠을 땐 아니었어. 4살 때 피아노를 배울 땐 피아노가 그렇게 미웠다고. 그런데 바이올린은 케미스트리가 맞았던 거지.”
-과르니에리를 좀 가까이 보고 싶습니다.
“(아기 다루듯 조심스럽게 꺼내 보여주며)보세요. 1735년에 태어났으니 280살이 넘었죠. 조셉 과르니에리가 직접 만든 건데 전 세계에서 150개 정도 있을 거예요. 인상이 부드럽고 신비한 악기입니다. 이 속에 들어있는 수만 가지 색채는 상상을 초월해요.”
-함께 연주한다는 생각이 드나요?
“(다시 정색하며)아니요. ‘함께’라는 표현은 시작도 안 한 거예요.”
-한 몸으로 연주해서 인지 표정과 자세가 정말 드라마틱해요.
“어렸을 때는 그 일로 야사 하이페츠에게 크게 혼이 났어요. 움직이지 말고 연주하라고. 그림처럼 서서 하라는 거죠. 그런데 제가 요즘 바흐의 무반주곡을 연주할 때 가만히 서서 해요. 하모니가 착착 올라가니까. 그걸 보고 또 어떤 영국 저널리스트는 또 “어떻게 움직이지 않고 연주할 수 있느냐?”고 신기해하더라고. 야사 하이페츠가 봤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잖아. 하하하.”
문득 궁금해졌다. 65년의 세월 동안 ‘긴 지옥(악보와 사투를 벌이는)’과 ‘짧은 환호’의 시간을 반복적으로 치러온 이 여인의 견고함은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우주의 별을 향해 온몸으로 모스 부호를 쏘아 올리듯, 그렇게 무대에선 포효하는 암사자였지만, 한편으론 갚아도 다시 늘어나는 빚처럼 몇 년 후의 연주 스케줄에 일상을 저당 잡힌 예술 채무자의 삶이 기막히진 않았을까.
그래서였을까. ‘칠순이 될 까지 솔리스트로 사랑받으니 얼마나 행복하냐?’는 질문에, 그녀는 노려보듯 되물었다. “어떻게 나한테 행복하냐고 물어볼 수 있어요?” 이어 또 폭죽 같은 웃음이 터졌다. “하하. 내가 기가 막혀. 나더러 행복한 인생을 살았냐니? 아냐. 아냐. 대신 난 기가 막히게 축복받은 인생을 살았어요. 그런데 지구에 태어난 수많은 인구는 다 제 각자 기막히게 축복받은 인생이잖아.”
-(우기듯이)그래도 특별히 행복한 순간들이 많으셨지요?
“아니요. 그렇다면 그건 완전히 거짓말입니다. 칠십을 살면서 가슴이 찢어진 게 한두 번이 아니야. 울음을 너무 울어서 난 울음이 안 나온다고.”
가뭄 끝의 논바닥처럼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러면 그 현의 소리는 다 눈물의 소리입니까?
“(떨리는 목소리로)두려웠어요, 나는. 공포의 우산 속에서 살았지. 사회의 기대에, 부모님의 기대에 어긋날까, 그게 너무 무서웠고, 그래서 늘 겁에 질려 있었어. 17살 때 스승인 미스터 갈라미언 손에 이끌려 뉴욕에서 세계 최고 오케스트라와 무대에 섰어요. 무대에서 내려와서 알았지. 내가 어마어마한 걸 했다는 걸. 아직도 기억나는 게 호텔의 벽지야. 호텔에 와서 벽지를 보고 얼마나 슬피 울었던지. ‘이게 내가 살아갈 인생이구나.’ 음악은 관중들에게 주는 거고, 내가 받는 박수갈채는 금방 지나가요. 그렇다면 나한테 남는 건 뭐냐? 결국은 내 악기 내가 사랑하는 소리… 알겠어요? 이게 얼마나 크레이지 러브냐고?”
그 운명을 알고도 그 길을 터벅터벅 걸어갔을 열일곱의 소녀가 생각나 마음이 아려왔다. 그녀가 다시 한번 셰익스피어 연극 대사처럼 부르짖었다. 이 얼마나 지독한 연분이고 지긋지긋한 사랑이냐고. 옛날엔 그 지독한 사랑의 열병에 제대로 소리가 안 날 땐 울고 머리카락을 다 잡아 뜯었다고. “카네기 홀에서 멘델스존 연주할 땐 끝나고 드레스룸에 들어가 문을 잠가 버렸어. 팬들이 겹겹이 나선형으로 줄을 서 있는데도 안 열어줬어. 연주 중에 음이 하나 튀었거든. 그런데 지금은 잡아 뜯을 머리카락도 없어요. 하하하.”
-완벽주의에 대한 강박은 다 사라졌나요?
“연주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해요. 아름다운 선율을 전달한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해요.”
나이가 들수록 정경화의 무대는 더욱 넓어졌다. 2014년엔 내전 중인 르완다를 찾아가 검은 얼굴의 소년들과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이듬해엔 전교생이 17명인 강원도 횡성의 산골 학교를 찾아가 비발디의 ‘사계'와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를 들려주기도 했다.
-공기가 찢어지도록 절정으로 치닫는 연주도 좋지만, 나이든 정경화가 편안하게 연주하는 모습도 감동적이에요.
“그게 다 무의식적으로 전달이 되는 모양이야. 고맙죠.”
-그런데 완벽하다는 건 뭘까요? 왜 우리 모두 그렇게 완벽을 추종하는 걸까요?
“1967년에 내가 레벤트리 콩쿠르에서 상을 받았을 때, 그때 내 연주는 테크니컬리 완벽했어요. 결백하고 순수한 괴물에 가깝지요. 지독하게 연습을 했으니까요. 이젠 테크닉으로는 그렇게 못해요. 그래서 레전드라는 말은 감사하지만 동의는 못 하겠어. 다만 내 음악을 선물로 받고 신비한 것을 간직할 수 있다면 좋죠. 그거 알아요? 소리는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않아요. 심장에 박힌 소리는 죽을 때까지 못 잊어요.”
-어머니가 없었다면 지금의 선생이 없었을 거라는 말을 종종 하셨어요. 어머니는 천부적인 교육자였다고요.
“어머니는 통찰력과 판단력이 남다르셨어요. 칠 남매의 갈 길을 딱딱 맞게 찾아주셨죠. 얘한테 지금 중요한 게 뭔지를 너무나 잘 아셨어요. 어머니는 우리 말을 정말 잘 들었어요. 부모가 애들 말을 안 들어주면 애들이 어떻게 성장을 하겠어요? 게다가 외할아버지는 애국심이 강하셨는데, 어머니와 저, 명훈(정명훈)이가 그 피를 받았어요. 칠 형제가 다 다른 걸 받아서 서로 경쟁하지 않고 사랑하며 살았어요.”
-정명훈, 정명화 정 트리오 가족과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나누세요?
“이젠 서로 모이지 않아요. 다 자기 살기 바쁘죠. 언니와는 종종 통화해요. 동생은 얼마 전 차 사고를 당해서 안타까워요. 저는 악기가 인생, 동생은 오케스트라가 인생이죠. 특히 동생은 외할아버지 피를 받아서 애국심이 강하고 한국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뜨거운지 몰라요.”
정경화의 목소리는 장조에서 단조로 수시로 코드가 바뀌었다. 옆에서 강아지 요하네스와 클라라가 주기적으로 ‘깽깽'대며 주인과 장단을 맞췄다. 그것은 아주 기묘한 실내악 연주였다. 그녀의 이야기는 가슴이 저미도록 쓸쓸하기도 했고 매우 격조 있고 웅장하기도 했다. 고음의 현이 공기 표면에 찰과상을 입히듯 나는 그녀의 고독에 육체적으로 반응해 자주 몸을 떨었다. 그녀가 사랑한 악기, 그녀가 그렸던 소리, 그녀가 우정을 나눈 작곡가… 곁에 있어도 늘 그리웠을 존재들…
-사랑하는 작곡가는 누구였나요?
“모차르트는 천재였어요. 브람스는 그렇지 않았어요. 그이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말도 못 해요. 고집불통일 만큼 노력을 했어요. 그 노력으로 로맨틱한 곡, 스트럭처가 강한 곡 거의 모든 장르의 곡을 고통을 품고 다 소화했어요. 바흐는 겸손했어요. 파르티타 2번, 샤콘느를 들어보면, 쬐끄만 나무통 악기로 지구상에 그런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바흐뿐이에요. 작년에 카네기홀에서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연주하면서, 나는 또 감탄했어요. 이 작은 악기에 이런 수만 가지 음률을 담다니. 나는 바흐가 바이올린으로 직접 연주하는 샤콘느를 들어보고 싶어요.”
정경화에게 모차르트와 바흐와 브람스는 이미 고인이 아닌듯했다. 그 누구보다 생생히 살아 신성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들이었다.
-언제 슬프세요?
“나는 굿바이가 슬퍼요. 나는 사랑을 잘 해요. 인간적인 사랑을 할 때는 심장에서 피가 철철 흐르도록 하지요.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 보낼 때가 제일 슬퍼. 나를 닮아선지 요하네스, 클라라도 ‘굿바이’를 제일 싫어해. 이거 봐, 헤어지는 순간이면 저렇게 눈빛부터 슬퍼진다고.”
-아이들 키울 땐 어떠셨어요?
“아들이 둘인데 참 예쁘게 커 줬어요. 첫애를 36살에 둘째를 39살에 낳았어요. 나는 평생 ‘미안하다 고맙다'를 달고 살았지. 1년에 120회 공연을 해야 했으니까. 우리 엄마처럼은 못했어요. 그냥 공간을 주고 찾아가도록 믿어줬죠. 엄마는(미소지으며), 행동도 재빨라서 적성을 딱딱 찾아줬죠. 명화 언니는 피아노도 바이올린도 안 맞으니까, 그날로 첼로 사가지고 와서 선생까지 붙여줬을 정도였죠. 하하하.”
어떤 이야기를 나누듯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자석처럼 따라붙었다. “요즘 부모들은 제발 애들 속 좀 썩이지 말라"는 일침도 세트였다.
-요즘 부모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 있을까요?
“자꾸 1등 하라고 재촉하지 마세요. 그러면 안 돼요. 아무리 1등 해도 속이 비면 나중에 망가져요. 그 속을 격려로 자신감으로 꽉꽉 채워줘야지. 우리 엄마는 평생 “안돼" 소리를 안 했어요. 우리도 겁이 많아서 위험한 짓은 안 했어. 동생 하나만 좀 유별났지(웃음).”
-어쨌든 선생은 60년대에 이미 음악 한류의 길을 내셨던 선구자예요. 현재 K팝 뮤지션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난 정말 감탄해요. 한국인들이 얼마나 탁월한지. 잠시도 한 자리에 있지 않고 길을 찾는다고. 그런데 이제 2년만 있으면 2020년이야. 지금 K팝의 선전을 보면서 나는 요하네스 브람스를 생각해요. 브람스는 200년 전 사람인데 지금 들어도 그 곡이 넓고 깊어요. 청년들이 어떻게 그 넓이와 깊이를 가져갈까? 나도 궁금해. 내가 요하네스(강아지) 엄마잖아. 그럼 요하네스 엄마인 내가 사는 모습이 청년에게 영감을 줄 수 있을까? 나는 61년에 바흐를 제대로 연주하겠다는 꿈을 품었어요. 그 꿈을 무려 55년 만에 이뤘어요. 2017년에 무반주 6곡 녹음하고 완주했으니까.”
그녀의 말대로 심판자는 시간이고, 그 시간 속에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걸러질 것이다. 정경화는 간간이 문장을 툭 던져놓는 식으로 말했기 때문에, 나는 그 메타포를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굴려야 했다. 게다가 요하네스가 클라라가 번갈아 짖어대서 어떤 주제는 정문으로 들어가서 뒷문으로 나와 맥락을 연결하는 데 애를 먹었다. 한국인의 탁월성을 이야기할 때는 엉뚱하게 ‘윷놀이'를 예로 들었다.
-윷놀이가 왜 한국인의 탁월성을 설명하는 데 힌트가 되죠?
“칠 형제 중에 나만 영국인과 결혼했지만, 아들 둘이 어릴 때 한국말도 잘했고 윷놀이도 많이 했어요. 윷놀이는 운도 좋아야 하지만 말도 잘 둬야 해요. 룰렛 베팅보다 훨씬 드라마틱해요. 모 4번에 윷과 걸이 나오면 한 번에 판이 끝나기도 하죠. 그걸 보면서 생각했어요. ‘인생은 갬블이다. 동시에 믿는 사람에겐 블레싱이다' 운이 좋아야 하겠지만, 할 노력을 다하면 보이지 않던 길이 뚫려요. 나는 음악도 오감이 아니라 그런 육감으로 해요. 하이 레벨로 올라갈수록 완전히 육감이죠.”
운명의 ‘윷’을 던지고 노력의 ‘말’을 놓는 육감의 세계. 그렇게 인생은 갬블인 동시에 블레싱이라는 정경화의 말이 평범한 우리들에게도 위안이 된다.
-어떤 꿈을 꾸세요?
“특별한 거 없어요. 앞으로도 청중들과 오래 아름다운 선율을 나누는 거죠. 나는 무대에서 연주하는 독특한 재능을 타고 났어요. 그건 인정해요. 하지만 예술가로 치자면 나는 크리에이터가 아니라 리크리에이터예요. 크리에이터는 작곡가죠. 나는 항상 작곡가들이 음악 세계에 중심이라고 생각해왔어요. 내가 그들의 악보에서 발견하는 것은 무한한 인내와 겸손이었어요. 바이올린도 그래요. 이놈의 악기도 겸손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만들어요. 지독하게 힘들지. 하하.”
어쨌든 그녀는 더이상 ‘현의 마녀'가 아니다. 완전한 음을 위해 몸부림쳤던 불완전한 나날들에 대한 보상으로 시간은 마침내 그녀를 ‘현의 현자'로 빚어냈다. 작은 바이올린을 손에 움켜쥐고 소리의 무지개를 찾아 떠났던 소녀가, 전 세계 최고 오케스트라와 함께 지구 곳곳에 찬란한 소리의 색채를 뿌리고 구기동 산자락에 앉아 웃고 있다. 피아노 위엔 베토벤의 전기가 서가엔 바흐의 악보가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