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父' '혁명가' 신화에 가린 손문의 진짜 얼굴을 밝히다

조선일보
  • 이선민 선임기자
    입력 2018.05.18 03:01

    '손문의 혁명' 펴낸 이승휘 교수 "복잡한 정치 구도로 언행 굴절"

    "중국국민당과 공산당에서 '국부(國父)' '혁명가'로 추앙받으면서 신화에 가려버린 손문의 진짜 모습을 1차 자료를 통해 밝히려고 했다. 수많은 연구가 나왔지만 뜻밖에 중요한 문제들이 빈 공간으로 남아 있어 연구 의욕을 자극했다."

    중국 근현대사를 전공한 이승휘(62) 명지대 교수가 '손문의 혁명'(한울아카데미)을 펴냈다. 900쪽에 이르는 저서는 손문(孫文·1866~1925)이 신해혁명 후 정권 장악에 실패한 뒤 일본으로 망명해 중화혁명당을 만든 1914년부터 북벌이 진행되는 중 간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를 따라가며 손문 연구의 공백을 채운다.

    이승휘 교수는 “손문에 대한 인간적 애착과 정치적 필요성이 만들어낸 ‘손문 신화’를 넘어서는 것은 역사학 본연의 실사구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승휘 교수는 “손문에 대한 인간적 애착과 정치적 필요성이 만들어낸 ‘손문 신화’를 넘어서는 것은 역사학 본연의 실사구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김지호 기자
    '손문 혁명'의 실체 파악에 필수이지만 피상적으로 이해돼온 주제는 1919년 5·4운동과 손문의 관계다. 기존 연구는 '위로부터의 혁명'을 추구하던 손문이 5·4운동으로 분출된 민중의 힘에 자극받아 '아래로부터의 혁명'으로 전환했고, 그 결과가 중국국민당 창당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손문은 5·4운동의 정점을 이룬 상해에 있었지만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자·학생·상인의 정치 활동을 경계했다. 이 같은 손문의 언행에 대해 이 교수는 "당시 북경 정부를 이끌던 단기서와 손문이 1919년 초부터 동맹을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신화가 사실(史實)을 가린 또 다른 예는 손문과 군벌(軍閥)의 관계다. 손문은 반제·반봉건을 내걸고 국공합작을 추진하던 1922년 무렵 북경의 직예파 군벌과 대립하던 봉천파·안휘파와 '반직(反直) 삼각 동맹'을 진행했다. 타도 대상인 군벌과 손잡은 것을 설명하기 어려워 그간의 손문 연구서들은 이를 외면했다. 하지만 이 교수는 "같은 시기에 진행된 두 정치 행위의 관계를 밝히지 않고는 손문 혁명의 올바른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1차 국공합작과 그것이 삼민주의(三民主義)에 미친 영향은 가장 중요한 주제이면서 가장 넓은 공백이다. 1922년 2차 광동 정부가 실패한 뒤 서북 지역에 군사 근거지를 모색하던 손문은 소련에 접근했다. 러시아혁명 후 중국에서 동맹자를 찾던 코민테른이 적극 반응했다. 기존 연구는 손문이 소련의 권유로 공산당원을 받아들이고 국민당을 개조했으며 반제·반군벌 성격이 강화된 '신(新)삼민주의'로 변화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중국국민당이 신삼민주의를 담은 '대회선언'을 발표한 1924년 1월 손문은 이와 내용이 전혀 다른 자신의 원래 삼민주의에 관한 강연을 시작했다. 이 교수는 "소련의 도움이 절실했던 손문이 코민테른의 요구를 수용하면서도 사상적 변화는 받아들일 수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손문은 평생 사상적으로 변화한 적이 없다. 그는 민중을 믿지 않았고 군사력에 의한 혁명을 추구했다. 중국이 통일되면 외세는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중국의 복잡한 정치 구도 속에서 굴절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휘 교수는 "언행이 모순으로 가득 찼고 '허풍쟁이'로 불렸지만 다른 정치가나 혁명가들이 갖지 못한 긴 안목과 넓은 전략을 보여준 인물이 손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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