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北 협상술

조선일보
  • 안용현 논설위원
    입력 2018.05.18 03:16

    북한 외교의 '기선 잡기 협상술'은 역사가 길다. 김일성은 1951년 평양에서 판문점 정전(停戰) 협상장으로 떠나려던 북 대표 남일을 불러 세우고 '승용차를 바꾸라'고 했다. 그러면서 1년 전 서울을 점령했을 때 노획한 주한 미국 대사의 전용차를 내줬다. 북 신문은 "적들이 승용차를 보는 순간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고 주장했다. 협상장에서 남일이 앉은 의자는 유엔군 대표 터너 조이 제독의 자리보다 10㎝ 이상 높게 만들었다. 훗날 조이 제독은 자신의 모습이 "어뢰 맞고 침몰하는 해군 같았다"고 했다.

    ▶북의 대표적인 협상술은 역시 '벼랑 끝 전술'이다. 1994년 이 전술로 제네바 북핵 합의를 이끌어냈던 강석주 외무성 1부상의 책사가 리용호 현 외무상이다. 리용호는 1990년 일찌감치 미국의 군축 전문가 양성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귀국 때 미국 학자가 쓴 핵 협상 관련 책을 한 배낭 싸들고 갔다. 곧바로 1차 북핵 위기가 터져 평양이 전쟁 공포에 떨었지만 리용호는 오히려 '전쟁 임박 상황으로 몰고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석주는 리용호를 믿은 덕분에 '영웅'이 됐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워싱턴포스트는 작년 9월 "한 국제회의에서 북 인사들이 트럼프 대통령 트위터를 '백과사전' 수준으로 통달하고 있었다"며 "이들이 미국 측 참가자들에게 트위터 내용을 알려주기까지 했다"고 전했다. 엊그제 김계관이 미·북 정상회담 무산 가능성을 내비치며 미국을 압박한 것은 노벨상을 원하는 트럼프의 영웅 심리를 종합 분석한 결과일 것이다.

    ▶북한 외무성에는 미국·핵·중국 등 한 분야를 20~30년씩 담당한 베테랑들이 수두룩하다. 장차관도 이들의 경험과 판단을 존중한다. 협상을 잘게 쪼개 보상을 극대화하는 '살라미 전술' 전문가인 김계관 1부상만 해도 40년 가까이 미국을 상대하고 있다. 무엇보다 북 외교는 호흡이 길다. 5년, 10년 뒤를 내다보는 작전을 짠다. 정권 교체가 없는 독재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지금 보는 북의 비핵화 평화 공세도 이미 2016년에 정해진 것이라고 한다. 정권이 바뀌고 장관이 수시로 바뀌는 한·미가 수세에 몰릴 가능성이 높다.

    ▶한 탈북 외교관은 "북 외교의 강점은 '절박함'에 있다"고 했다. 가진 것이 핵밖에 없는 최빈국이 절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사실 절박함으로 치면 핵 인질인 한국이 더해야 정상이다. 물론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