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매는 춘향이 로드매니저" 古미술판 흔든 이 사내의 입담

조선일보
  • 유석재 기자
    입력 2018.05.17 03:00

    [판을 바꾼다] [2] 탁현규 간송미술관 연구원

    미디어아트 결합한 신개념 전시… '바람을 그리다'展 5만 관객 이끌어
    '제2의 유홍준'으로 불리며 주목

    검정 뿔테 안경을 쓴 남자의 표정이 신윤복의 그림 '월하정인(月下情人)' 앞에서 돌연 화사해졌다. "아름다운 사건들은 보통 달빛 아래서 일어나죠. 연인들이 눈을 피해 만나기 딱 좋은 장소니까요." 곧이어 달 뜬 밤 두 남녀가 밀회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탁현규(46) 간송미술관 연구원의 입담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자세히 보면 초승달이 위로 볼록하게 누워 있어요. 살포시 치켜세운 여인의 눈썹과 같은 모습이죠? '두 개의 달'이 뜬 셈입니다." 변사(辯士) 뺨치는 찰진 말솜씨. "이제 화가는 그림 한쪽에 '달빛 침침한 한밤중에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안다'는 글씨를 써서 시치미를 뚝 뗍니다. 보는 이에게 풍부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죠. 신윤복 인기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탁현규는“우리 명화(名畵)에서 미처 못 봤던 것, 숨겨진 것들을 새롭게 드러내고 싶다”고 했다.
    탁현규는“우리 명화(名畵)에서 미처 못 봤던 것, 숨겨진 것들을 새롭게 드러내고 싶다”고 했다. /이태경 기자
    국보·보물만 43점인 한국 고미술의 보고(寶庫) 간송미술관 걸작들이 '신세대 통역자' 탁현규를 만나 새로운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별명이 '제2의 유홍준'. 고미술이 어렵고 따분하다는 편견은 '탁현규표 전시'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진다. 그가 기획한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의 특별전 '바람을 그리다: 신윤복·정선'(24일까지)은 관람객이 5만명 가까이 몰렸다. 입소문은 해외까지 나서 외국 작가들이 앞다퉈 이곳을 찾는다. 간송 전시 아니면 만나기 힘든 진품들이 화려한 미디어아트와 조화를 이룬 데다 노소(老少) 없이 즐기고 이해할 수 있는 구성과 해설이 이목을 사로잡았다.

    신윤복 그림을 소재로 한 미디어아트.
    신윤복 그림을 소재로 한 미디어아트.
    인스타그램의 해시태그(#) 형식으로 그림을 설명한 부분이 특히 인기를 끌었다. 어린 양반이 연상의 기녀를 만나는 '소년전홍'에는 '#누난너무예뻐 #머리에피도안마른게 #근데왜설레지', 봄나들이를 그린 '연소답청'에는 '#걸크러시 #잘나가는언니들 #머리에꽃은좀'이란 해시태그를 붙여 관객들을 자지러지게 했다. 탁 연구원은 "젊은 직원의 아이디어를 적극 수용했을 뿐"이라며 싱긋 웃었다. 그의 해설은 한술 더 뜬다. 신윤복의 그 유명한 '단오풍정'을 해설하는 대목에선 폭소가 터진다. "한양기생연합회 워크숍! 단옷날 기녀들끼리 소풍을 왔는데 두 명의 사미승이 훔쳐보고 있죠? 붉은 치마 입고 그네 타는 여인은 틀림없는 춘향이인데, 저기 머리에 보따리 이고 가는 여인이 있으니 춘향이 엄마 월매. 저는 월매를 이렇게 불러요. 춘향이 로드매니저!"

    탁 연구원은 서강대 사학과를 다니던 시절 우연히 간송미술관 전시를 관람했다. 이후 "최완수 선생님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새로운 세상에 빠져들었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료(史料)는 승자에 의해 각색되고 윤색될 수 있지요. 하지만 미술품은 거짓말을 못 하는 최후의 사료입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하면서 간송에 몸담았고 "우리 미술이야말로 지식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예술품이란 걸 깨달았다"고 했다. 정선 그림을 다른 각도의 사진과 비교할 수 있도록 전시하고, 신윤복 그림을 영화의 스틸컷처럼 소개하는 등 고미술 전시의 틀을 바꾼 것도 이 때문이다. "고미술에 담긴 짜릿하고도 해학이 넘치며 기품 있는 드라마를 전시에서 놓칠 수야 없죠."

    '고화정담' '그림소담' 같은 책도 낸 탁 연구원은 "어려운 미술 이론 대신 재미있고, 친절하고, 숨은 뜻을 읽어주는 해설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문장 한 줄도 어떻게 쓸까 고민 많이 해요. 조선일보 '양해원의 말글탐험'도 큰 도움이 되죠. '~적(的)'이란 단어 하나만 빼도 글이 예뻐지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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