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윤의 맛 세상] 밥, 主食에서 美食 되다

입력 2018.05.17 03:11

젊은 층 '밥심'보다 '빵심'으로 살고 중·장년층은 탄수화물 기피
쌀 소비량 줄어 '助演'으로 전락

반면 즉석에서 쌀 도정해주고 개인 밥솥에 밥 지어주는 등 다양한 쌀 가게·밥집 등장에 안도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구수한 밥 짓는 냄새가 코를 벌렁거리게 하더니 이내 식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최근 서울 돈의문박물관마을 '레브쿠헨' 요리 스튜디오에서 열린 토종 쌀 시식회. 부드러우면서도 차진 식감과 달큰한 감칠맛이 씹을수록 입안에 감돌았다.

이 쌀밥은 '대관도(大關稻)'라는 토종 쌀로 지었다. 이 쌀의 생산자이자 토종 쌀 되살리기에 적극적인 '우보농장'의 이근이 대표는 "이름이 낯설겠지만 오랫동안 충청도와 경기도, 경북 일부 지방에서 재배했던 품종"이라며 "조선시대 궁궐에 진상되거나 양반에게 바치던 쌀"이라고 설명했다.

이삭이 능수버들 느낌이 나게 휘어져 '버들벼', 까락(낟알 껍질에 붙은 깔끄러운 수염)이 검지만 낟알은 작고 하얀 찹쌀 '흑갱(黑粳)' 등 알기는커녕 들어보지도 못한 토종 쌀로 만든 여러 음식이 연이어 나왔다.

한국인의 주식(主食)은 아직도 밥일까. 쌀 소비량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요즘 한국인은 쌀밥을 일주일에 평균 여섯 번 먹는다. 밥을 한 끼도 먹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이들이 적지 않단 소리다. '밥심'이 아니라 '빵심' '파스타심'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젊은 층에선 이미 많다. 중·장년층도 탄수화물이 건강에 좋지 않다며 먹는 양을 확 줄인다.

밥이 식탁의 주연에서 조연으로 밀려나는 요즘, 아이러니하게도 쌀과 밥이 미식(美食)의 대상이 되고 있다.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해서 관심 밖이던 쌀밥이 우리 식생활의 중심에서 밀려나자 비로소 그 가치를 깨닫게 된 것일까. 쌀 시식회가 최근 여기저기서 열리고 있다. 어떤 쌀 품종이 있으며, 짓는 방식에 따라 어떻게 밥맛이 달라지는지, 쌀로 할 수 있는 요리가 밥 말고도 뭐가 있는지 등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행사에 몰리고 있다.

[김성윤의 맛 세상] 밥, 主食에서 美食 되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도 음식을 10년 넘게 취재하면서 쌀에 대해서는 꽤 안다고 자부했지만, 일제(日帝)가 1910년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그때까지 우리 토종 쌀이 1451종(種)이나 존재했다는 건 이근이 대표에게 처음 들었다.

"1970년대 쌀 자급자족을 위해 통일벼를 개발한 것처럼 그동안 정부의 쌀 정책은 생산량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밥맛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농사짓는 쌀이 다수확 품종으로 단일화되면서 토종 쌀이 사라지다시피 했지요."

쌀의 기능성, 즉 밥맛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최근 일이다. 이에 따라 와인이나 커피처럼 쌀도 품종이나 생산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가게도 생겼다. 지난해 12월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문을 연 '동네정미소'는 '자광도' '북흑조' '자치나'처럼 잊혔던 토종 쌀을 포함, 30여 가지 다양한 쌀을 갖췄다. 와인 소믈리에와 커피 바리스타가 손님의 취향을 듣고 어울리는 와인이나 커피를 골라주듯, 선호하는 밥맛이나 용도에 따라 쌀을 추천해준다.

예를 들면 볶음밥용으로는 '고시히카리'보다 '신동진'이나 '하이아미'를 권하는데, 고시히카리가 밥을 짓기엔 알맞지만 찰기 적고 쌀알이 단단한 신동진·하이아미가 볶음밥 만들기에는 더 낫기 때문이다.

쌀을 선택하면 즉석에서 쌀을 도정(搗精)해준다. 도정 정도, 즉 쌀겨를 얼마나 벗겨낼지도 선택할 수 있다. 판매 단위는 400g 소포장으로, 밥 4~5공기 지을 분량이다. 밥맛에 반해 대량 구매를 희망하는 단골도 있지만 2㎏ 이상은 팔지 않는다. 갓 도정한 쌀을 신선할 때 다 먹도록 하기 위해서다.

쌀밥을 식탁의 주인공으로 복권시킨 식당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서울 신사동 '현대카드 쿠킹라이브러리'에서는 매일 아침 도정한 쌀 3가지 중 하나를 고르고 백미와 오분도미(五分搗米·쌀겨층을 절반만 벗겨 쌀눈이 남도록 도정한 쌀) 중 선택하면 개인 밥솥에 밥을 지어준다. '동네정미소'는 쌀을 팔기만 하지 않고 갓 도정한 쌀로 지은 밥이 얼마나 맛있는지를 체험할 수 있도록 식당도 함께 운영한다. 종로구 내수동 '미학 상차림'은 매일 아침 도정한 쌀로 1인용 돌솥에 지은 밥을 생선구이 등 밥맛 돋우는 반찬들과 함께 낸다. 바쁘다고 스테인리스 밥주발에 식사 시간 한참 전 담아놔 군내 나는 미지근한 떡 같은 밥과는 차원이 다르다.

다양한 쌀을 신선한 상태로 구입할 수 있는 쌀가게, 진짜 밥맛을 보여주는 밥집이 조금씩이나마 늘고 있어 기쁘다. 밥이 우리 식탁에서 사라지진 않으리란 안도감(安堵感)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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