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서울 마포구 대흥동의 한 초등학교에서 '스승의 은혜' 노래가 울려 퍼졌다. 낭랑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머리 희끗한 평균 나이 71세 재학생들. 학력 인정 평생교육 시설인 양원초등학교(4년 과정) 학생들이 꾸민 스승의 날 행사였다.

양원초등학교는 정규 학교에 다니지 못한 사람들이 뒤늦게 배움을 위해 찾는 곳이다. 이선재(82) 교장이 제자들과 한 명 한 명 눈 맞추며 악수했다. 지난해 입학한 350명은 55년 동안 평생교육사업을 해온 이 교장의 마지막 양원초 제자들이다. 그는 학생들과 함께 '공부는 재미있게, 학교는 즐겁게, 인생은 행복하게'라는 교훈을 외치며 활짝 웃었다.

15일 제자들과 스승의 날 행사를 가진 이선재 양원초등학교 교장.

이 교장은 올해부터 양원초 신입생을 받지 않았다. "내 손으로 입학시킨 학생들은 졸업까지 책임지고 싶다"며 "지금 신입생을 받으면 4년 후에 졸업을 시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어서…"라고 했다. 평생교육법에 따라 재단법인·학교법인에만 학력 인정 평생교육 시설 인가를 내준다. 2007년 이전 설립된 시설은 설립자가 물러날 경우 학교 운영자가 법인으로 전환돼야 한다.

법인이 되기 위해선 시설 마련 등 여러 조건을 갖춰야 하는데, 못 배운 이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그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이 교장이 은퇴하면 학교는 문을 닫아야 한다. 양원초를 졸업하면 이 교장이 운영 중인 일성여자중·고교(각 2년제)로 입학하는 경우가 많다. 법인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일성여중·고도 향후 몇 년 안에 신입생을 받지 않을 계획이다.

스승의 날 행사에 졸업생 70여 명이 찾아왔다. 시인으로 등단한 황찬순(63)씨는 최근 낸 시집을 이 교장에게 선물했다. 이 교장과 동갑내기 제자도 있었다. 장일성(82)씨는 "교장 선생님 덕분에 삶의 자신감을 얻었다"며 수줍게 웃었다.

이 교장은 자신이 "못 배운 한(恨)을 풀어주는 '씻김굿'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1936년 개성에서 태어난 이 교장은 1·4 후퇴 때 서울로 피란 와 어렵게 대학을 졸업했다. 돈 받지 않고 하숙생으로 받아준 이웃, 주말에 장사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선생님들 도움이 컸다. 받은 만큼 보답하고 싶다는 마음에 1960년 야학을 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일성고등공민학교가 1년 치 월세를 내지 못해 건물에서 쫓겨나 노천에서 수업하고 있다'는 조선일보 기사를 봤다(1963년 9월 11일 자 '교실 없는 개학'). 그는 "일성고등공민학교가 피란민 자녀들을 가르치던 학교라는 얘길 듣고 돕고 싶어 무작정 찾아갔다"고 했다. 야학에서 가르치던 학생들을 이 학교로 데려와 입학시켰고, 한의원을 운영하던 지인 도움을 받아 어렵게 학교를 일으켜 세웠다. 이렇게 1963년 일성학교와 연을 맺은 이래 55년간 5만6000명의 학생이 이 교장 품에서 만학의 꿈을 틔웠다.

전쟁 직후에는 중학교 시험에 떨어진 이들이나 학비 낼 형편이 안 되는 어린 학생이 많았다. 이 교장은 "구로공단 여공들, 무학(無學)의 주부들이 글을 배우고 영어를 읽고 싶다며 찾아왔다"고 했다. 학생들 열의가 대단했다. 하도 일찍 등교하는 바람에 '현관문은 아침 7시 30분에 엽니다'라는 안내문을 붙여야 할 정도였다.

일성여중·고는 12년째 졸업생 전원이 대학에 합격했다. 이 교장은 "유명 프랜차이즈 CEO가 된 졸업생도 있고, 박사 학위 받은 제자도 있다"며 자랑했다. 학교 컴퓨터 교사 김학연(59)씨는 대학 졸업하고 이 교장과 같은 길을 걷겠다며 돌아와 교편을 잡았다. 그는 가정형편 탓에 중학교를 못 다닌 한을 풀려고 아들을 군대에 보낸 2012년 일성여중·고에 입학했다. 김씨는 "초등학생 때 꿨던 선생님의 꿈을 우리 교장 선생님 덕분에 이뤘다"고 했다.

이 교장은 "마지막 꿈은 모든 사람이 제때 교육을 받아 양원초와 일성여중·고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여전히 국내 517만명에 이르는 성인이 중학교 미만 학력을 가지고 있다. 이씨는 "내가 해온 성인 교육을 이제 국가가 책임지고 완수해주길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