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33] 봉인 풀린 '웅진 천도'의 비밀

조선일보
  •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입력 2018.05.16 03:11

    금동관, 수촌리 1호분, 국립공주박물관.
    금동관, 수촌리 1호분, 국립공주박물관.
    2003년 9월 29일, 이훈 부장과 강종원 위원 등 충남역사문화연구소 연구원들은 공주시 북쪽 외곽에 있는 수촌리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애초에 이 부장은 중요 유적의 분포 가능성을 낮게 봤다. 공주는 63년간 백제의 왕도였지만 그 시기 유적은 금강을 기준으로 '강남'에 집중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발굴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곳곳에서 백제 무덤 흔적이 드러난 것이다. 특히 무덤 5기가 원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었다. 윤곽만 보고도 이 부장은 범상치 않은 무덤임을 단박에 알아챘다.

    11월 3일, 이창호 연구원의 꽃삽에 금동 신발과 장식 대도가 걸린 것을 신호탄으로 1호분에서 금동관, 금귀걸이, 금동 허리띠 장식, 중국 자기, 각종 마구(馬具) 등이 연이어 출토됐다. 고고학자들이 그토록 찾으려던 5세기 전후(前後) 백제의 중요 무덤이 공주에서 발굴된 것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압권은 금동관과 금동 신발이었다. 금동관은 화려한 장식에 더해 유려한 용무늬를 갖춘 것이었고 금동 신발 속엔 무덤 주인공의 발뼈가 들어 있었다. 인접한 3호분과 4호분에서도 1호분에 필적하는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발굴 성과가 '무령왕릉 이후 최대 백제 고분군 발굴' '백제사 다시 써야'등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학계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인파가 몰려 발굴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때 발굴된 유물은 이듬해 5월 무령왕릉 주변으로 이전한 국립공주박물관에 둥지를 튼 채 백제 문화의 전령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되었고, 고분군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다.

    학계에선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것을 지세가 험준하기 때문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 발굴 후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위기에 몰린 백제 왕실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세력이 공주에 있었기에 그곳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보는 견해다. 수촌리 고분군 발굴은 백제사의 여러 수수께끼 가운데 핵심에 해당하는 '웅진 천도의 비밀' 해명에 결정적 단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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