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R&D 일자리도 해외로 밀어내나

입력 2018.05.16 03:15

제조업체 한국 떠나도 남아 있던 연구센터들, 週 52시간제 앞두고 대혼란
'脫한국' 폭발할 수도

호경업 산업2부 차장
호경업 산업2부 차장

지도를 펼쳐보면 우리나라 수도권 일대는 거대한 연구개발(R&D)센터의 집적지다. 삼성전자는 서울 우면동과 수원에, LG전자는 서울 마곡과 양재동에 대규모 R&D센터를 두고 있다. 현대차는 경기 화성시 남양에 신차 연구소를 운영하며 SK하이닉스는 경기 이천에 반도체 연구소를 두고 있다. 판교엔 7만명에 달하는 IT·게임·바이오 연구 인력이 출퇴근을 한다.

연구센터 붐은 역설적이게도 최근 10여 년간 제조업의 탈(脫)한국 현상과 함께 진행돼 왔다. 기업들마다 제조 공장은 중국과 베트남 등으로 나갈지라도 한국엔 두뇌 역할을 하는 연구센터를 지었다. 국내 기업 부설 연구소는 2010년 2만 개, 2014년 3만 개에 이어 올해 4만 개를 돌파했다. 한국 기업의 R&D는 IT 신제품, 신약 임상 실험, 게임 신작 같은 개발 일정이 나오면 그에 맞춰 착착 결과를 내놓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 한국이 자랑하던 연구개발 현장이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오는 7월 300인 이상 작업장의 주 52시간 근무 일괄 시행을 앞두고서다. 기업마다 주 52시간 근무를 시범 실시해 본 결과, 사무직과 영업직군은 시간 조절을 통해 어떡하든 주 52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연구직군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결론을 냈다.

국내 10대 수출기업 중 한 곳인 A기업 임원은 이렇게 말했다. "IT업계의 연구개발은 시간 싸움이다. 프로젝트 단위로 움직이는 개발팀은 길게는 1년 넘게 한 제품에만 매달린다. 제품 출시 직전은 비상이다. 이 때문에 밤샘 작업하는 경우도 많은데 그렇게 일하면 처벌한다고 하니 망연자실할 뿐이다."

반도체, 휴대폰 같은 기술 집약 품목을 개발하는 연구직이 제품 출시를 앞두고 오후 5시에 퇴근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반문(反問)이다.

사람을 더 채용한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다. 연구개발 직군에선 담당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일을 대신하기 어렵다. 또 다른 국내 굴지의 수출기업에서는 난상토론을 벌이다가 "연구개발 분야를 해외로 이전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왔다고 한다.

이 혼란은 국회가 올 2월 근로시간 단축안을 통과시킬 때 이 규제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특례 업종에서 연구개발을 제외하면서 불거졌다. 이후 기업들은 3개월까지만 허용되는 탄력적 근로시간제 기간을 독일·일본 같은 선진국처럼 6개월~1년으로 확대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법을 바꿔야 하는 문제이기에 큰 기대를 하지 않는 분위기다. 임시방편으로 개별적으로 근무시간을 조정하는 각종 유연근로제 방안이 수출기업 인사 담당자들 입에 오르내린다. 현재까지 명쾌한 정부 지침은 없다. 한 임원은 "정책 리스크로 인한 시행착오 자체가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기업들은 제조 공장을 해외로 옮기면서 "애국심만으로 한국에 공장을 운영할 순 없다"고 말해왔다. 갈수록 높아지는 정부 규제 속에서 치열한 원가 경쟁을 벌이는 기업들이 한국에 있다간 앉아서 망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처음엔 저임금을 기반으로 한 공장만 나가다가 삼성 휴대폰 공장 같은 첨단 분야도 베트남으로 갔다.

주 52시간 근무는 정부가 선(善)한 의지를 갖고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업종 구분 없이 밀어붙이기식으로 진행한다면 또 다른 경쟁력 약화 요인이 될 게 분명하다. 기업들은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기술 경쟁을 위해 해외 연구소 신설을 대책 1순위로 올릴지 모른다. 연구개발에서도 '탈한국' 현상이 폭발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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