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 알수록 깊은 세계… 골프와 와인 닮았죠"

입력 2018.05.12 03:01

[스타의 이중생활] '와인 마니아' 박세리

"멋진 와인은 척박한 땅에서 나와…
그래서 산전수전 겪은 골퍼가 팬들에게 인기가 있나 봐요"

"한국 여자 골프가 40년 역사밖에 안 되지만 열정(passion) 하나로 LPGA 종가인 미국을 제치고 세계 정상에 올랐잖아요. 척박한 토양에서 자란 포도가 독특한 풍미를 뿜어내는 멋진 와인으로 변신한 것과 닮은꼴 아닐까요?"

최근 경기도 양주의 레이크우드 컨트리클럽에서 만난 박세리(41)는 골프장 레스토랑의 한 벽면에 진열된 와인을 보며 "제가 좋아하는 와인들도 여럿 있네요"라며 웃음 지었다.

박세리는 원래 맥주를 즐겼다. 2007년 브리티시 여자오픈 땐 한국 후배들을 모아놓고 맥주 원 샷 대회를 열기도 했다. 박세리는 "LPGA 투어 생활을 하면서 지인들과 여유 있게 식사하는 기회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와인에 빠져들었다"고 했다.

이미지 크게보기
박세리는 “투어 생활을 하면서 와인의 세계에 점점 빠져들기 시작했다”며 “슬럼프에 빠졌던 시절 위로해 주는 지인들과 함께했던 와인에는 힐링의 힘이 있었다”고 했다. 경기 양주시 레이크우드 컨트리클럽의 레스토랑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세리 와인’과 함께 포즈를 취한 박세리. /고운호 기자

"사실 한국 선수들은 이목이 있는 곳에서는 술 한 방울 입에 대기도 쉽지 않아요. 외국 선수들은 라운드 마치고 자연스럽게 맥주 한잔하는데, 한국 선수들이 그러면 '누가 술 마시고 다닌다'는 소문이 쫙 퍼지거든요. 컨디션 유지를 위해 독한 술은 마실 수 없으니, 스테이크나 생선 등 음식과 어울리는 와인을 음미하면서 맛을 알게 됐죠."

박세리가 가장 좋아하는 와인 품종은 '입안에 깊고 진한 향이 도는 카베르네 소비뇽'이다. 100만원 넘는 고가 와인들을 선물받아 본 적 있지만 대중적인 와인을 더 좋아한다고 했다. 캘리포니아와 프랑스 와인을 50병가량 모아보기도 했다.

박세리는 은퇴 무렵부터 열심히 미국의 유명 와이너리가 몰려 있는 캘리포니아주의 나파밸리 투어를 다니고 있다. 지금도 미국 방문 때 시간이 날 때면 나파밸리 와이너리를 찾는다고 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미국 와인의 아버지라 불리는 로버트 몬다비(1913~2008)가 만든 와이너리다. 몬다비가 만든 와인의 코르크에는 '와인은 열정이다(Wine is passion)'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와인을 골프, 특히 코리안 골프로 바꿔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침 박세리와 만난 레이크우드 컨트리클럽은 올드 팬들에겐 '로얄CC'라는 옛 이름으로 익숙한 곳이다. 1978년 이곳에서 국내 최초 여자프로테스트가 열렸다. 강춘자, 한명현, 구옥희, 안종현 등 4명의 국내 최초 여자 프로골퍼가 탄생했다. 캐디를 하던 이들은 골프장 회원들에게 클럽을 빌려 테스트에 나갔었다. 박세리는 "이런 사실을 안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면서 "척박한 한국 여자 골프 토양에서 세계 1위 박인비를 비롯해 LPGA 투어를 지배하는 선수들이 끊임없이 나온다는 것은 열정 외의 다른 말로는 설명이 힘들다"고 했다.

박세리는 "골프와 와인은 태양과 바람, 땅 등 자연과 밀접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공통점이 있다"며 "좋은 골프 라운드를 빚어낸 이에게 포도주 주전자를 상으로 주는 전통이 그래서 생긴 것 아니냐"고 했다. 1860년 출범해 최고(最古) 전통의 골프 대회인 디 오픈(브리티시오픈) 우승 트로피가 바로 은으로 된 포도주 주전자인 '클라레(프랑스 보르도산 레드 와인) 저그'다. 호주의 '백상어' 그레그 노먼과 남아공의 '빅 이지' 어니 엘스 같은 대선수들은 직접 와이너리를 만들어 명품 와인을 생산하고 있기도 하다. 박세리도 자신의 이름을 딴 '세리 와인'이 있다. 챔피언, 롱기스트, 니어핀 등의 별칭을 붙인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산 와인이다. 그는 "언젠가는 골프장과 와이너리를 함께 설계해 만들어 보고 싶다"며 "격식을 차리는 자리만을 위한 게 아니라 고단한 일상을 치유하고 편안한 마음을 주는 와인을 만들어 보고 싶다"고 했다.

좋은 환경에서 좋은 와인이 나올 것 같지만 역설도 존재한다. 토양이 척박할수록 포도나무 뿌리는 물을 찾아 수십m 깊은 땅속으로 내려간다. 이 과정에서 색다른 향이 추가된다. 박세리는 "그래서 팬들이 산전수전 다 겪은 골퍼들에게서 매력을 느끼는 것 아닐까요"라고 했다.

박세리는 "와인의 세계는 알면 알수록 더 깊은 세계가 나온다는 점에서 골프와 닮았다"며 "골프가 제 인생에 와인이라는 좋은 취미 생활까지 준 것 같다"고 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