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한글학자 외솔, 정작 사투리 심해 해방을 '해뱅'이라 발음해 웃겨

조선일보
  •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18.05.12 03:01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25) 최현배(1894~1970)

    옥중에서 해방 맞은 외솔… 미군정청 문교부로 들어가 초중고 한글 전용 밀어붙여
    6·25 피란 시절 깎고 다듬던 한글 원고 독 속에 넣어 땅에 묻어
    그의 장례식장에선 패티 김이 추모 노래 불러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겨레의 스승 최현배는 표정이나 태도가 항상 근엄하여 그를 최현배라고 부르기도 송구스럽다. 그래서 나는 한글로 지어진 그의 아름다운 아호 '외솔'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울산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외솔은 어려서 동래로 가 일신학교에 다녔다. 워낙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어서 시골에서도 오늘의 경기고인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고 졸업과 동시에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갔다. 그 학교를 마치고 경도대학 철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 다시 교육학을 전공하여 석사 학위를 받았다고 들었다.

    연희전문에 다닐 때 학생으로 외솔에게 가르침을 받은 박병호라고 하는 이가 부총장 일을 보던 외솔 밑에서 학교 농장을 돌본 일이 있었다. 박병호가 언젠가 나를 보고 외솔에게 야단맞은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농장 경영에 필요한 예산을 세워 오라고 하시기에 큰마음 먹고 계획을 잘 세워 예산을 꾸미고 외솔을 찾아갔더니 "일본에서는 고학하여 성공한 사람은 대신(장관)으로 쓰지 않는다는 말이 있던데 이 계획서를 보면 자네 너무 스케일이 작아"라고 책망하시더라는 것이다. 박병호는 고학하면서 연희전문을 졸업했는데 외솔은 그런 사실을 아는 터라 자기를 향해 좀 더 큰 사람이 되라는 격려를 한 것이라고 그는 풀이하고 있었다.

    외솔의 삶에 크나큰 전기를 마련해 준 만남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그가 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3년 동안 겨레의 존경을 받던 한글학자 주시경의 조선어 강습원에 등록하고 한글을 배우고 연구했던 사실이었다. 그가 일본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교육학을 배운 것도 그 배후에는 한글의 연구와 보급에 뜻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1926년에 일본서 돌아온 외솔은 연희전문의 교수로 취임했지만 2년 뒤에 신흥우가 창립한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인해 파면되기도 하였는데 1941년에야 복직이 가능하였다. 외솔은 이미 조선어학회를 창설하고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의 준비위원이 되기도 했는데 1933년에는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일본 총독부는 뜻밖에도 조선어학회사건을 허위 날조하여 1942년 10월 어학회원들을 검거, 투옥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1939년 4월부터 각급 학교 국어 과목을 철폐하였고 한글로 된 신문과 잡지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 황당한 사건으로 조선어학회의 주요 회원들이 줄줄이 연행, 검거되었는데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등이 함경남도 홍원 경찰서에 수감되었다. 이들은 홍원 경찰서 유치장에서 야만적 고문을 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함흥검찰국에 송치되었는데, 1943년 12월에는 이윤재가 옥사하고 그 이듬해 2월에는 한징 또한 옥중에서 목숨을 잃었다. 나머지 11명은 함흥에서 재판을 받고 각각 징역 2년에서 6년까지 선고받아 외솔도 8·15 해방이 되는 날까지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그는 으레 연희전문으로 돌아와야 할 것인데 뜻밖에도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장으로 취임하였다. 왜 그런 자리를 자진하여 택한 것일까? 우리는 그의 아호 '외솔'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신라의 대학자 최치원의 호는 '고운'(외로운 구름), 조선조의 대선비이던 윤선도의 아호는 '고산'(외로운 산)이었다. 외솔은 스스로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하여 아마도 '외로운 소나무'가 되었을 것이다. 성삼문도 그렇게 읊었지 않았던가.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때 독야청청하리라.' 성삼문의 그런 심정이 한글을 위해 악전고투하던 외톨이 외솔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한다.

    미군정청에 그가 편수국장으로 들어간 뜻은 하나밖에 없었다. 한글 전용이었다. 초·중·고의 교과서를 모두 한글로만 편성되게 최선을 다한 한글학자 외솔. 그는 6·25 피란 시절에 자신이 깎고 다듬던 한글 원고를 독 속에 넣어 땅에 묻어 놓고 피란길에 올랐다고 한다.

    외솔은 우리를 감동하게도 하였고 웃기게도 하였고 놀라게도 하였다. 표준어를 제정하고 한글 학자로 그 일선을 담당했던 그가 강의하면서 경상도 사투리를 버리지 못하고 '해방'이라고 발음하지 못하여 '해뱅'이라고 발음하여 모든 학생을 웃기기도 하였다. 자유당의 횡포가 심하였을 때 외솔은 학생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유당 정권을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저렇게 말씀하셔도 되는가'라며 걱정하던 이들도 없지 않았다. 우리를 즐겁게 한 일도 있다. 1970년 외솔이 세상을 떠났을 적에 나는 외유 중이어서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였지만, 외솔이 패티 김의 노래를 무척 좋아했다고 하여 그의 장례식장에서 유행가수 패티 김이 추모의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은 우리의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다.

    외솔은 한글 사랑이 나라 사랑임을 가르쳐 주었다. 겨레의 통일을 앞두고 북의 인민공화국이 우리와 같은 것이 하나 있다. 주의도 사상도 체제도 다르지만 한글을 전용하는 사실 하나만은 남과 북이 한결같다. 대한민국이 오늘 이렇게 발전한 원인 중 하나가 한글 전용이고 남과 북을 머지않아 하나 되게 하는 힘도 한글 전용에 있다. 이 글을 끝맺으면서 한글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외솔 최현배에 대하여 고개를 숙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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