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써야할 때도 안쓰는 당신, 내가 힘든건 알아?

조선일보
입력 2018.05.11 04:00

[삶의 한가운데 | 별별다방으로 오세요!]

우리는 결혼할 때 영원한 사랑과 헌신을 약속합니다. 하지만 결혼생활이 우리에게 우선 요구하는 것은 조화의 능력입니다. 나와 다른 점을 인정하고, 그 차이점을 오히려 활용하는 요령. 상대방을 거울삼아 자신을 되돌아보는 지혜. 그렇게 발맞추어 나아가는 길이 행복한 부부의 길이 아닐지요. 홍여사 드림

써야할 때도 안쓰는 당신, 내가 힘든건 알아?
/일러스트=안병현
"인심은 혼자 다 얻고 나만 나쁜 여자 만드네."

어린 시절 내내 듣던 엄마의 푸념입니다. 좋게 말하면 호인, 깎아 말하면 사람이 물렀던 아버지 때문에 뒤에서 고생하는 건 엄마였으니까요. 당신 구두는 밑창이 닳도록 오래 신으시면서 부모·형제 처가 식구들에겐 돈을 쥐여주지 못해 안달이었던 아버지. 조카들만 보면 용돈을 푸시는데, 그러다 지갑에 돈이 부족하면 호기롭게 엄마를 부르셨죠. 어이, 여기 돈 좀 갖고 와!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랐기에 남자는 다 그런 줄 알았습니다. 남편의 씀씀이를 감시하는 것이 아내의 책무 중 하나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결혼을 하고 보니 정작 제 남편은 그런 남자가 아니었습니다. 돈에 관해서 늘 신경 쓰고, 천원짜리 한 장도 허투루 쓰는 사람이 아닌 겁니다. 오히려 아내의 씀씀이에 감시의 눈초리를 보내는 그런 사람이 바로 제 남편입니다.

물론 연애 기간에도 조짐은 있었죠. 밥값은 거의 남편이 냈지만, 식당을 고를 때는 언제나 가성비가 최우선이었습니다. 저는 프러포즈도 버스 안에서 받았습니다. 제가 내려야 할 역이 가까워져 오는데, 그제야 남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더군요. 나, 월급 통장 **씨한테 다 갖다 맡기고 싶은데, 그걸로 밥 좀 먹여줄 수 있겠어요? 꽃 한송이, 반지 하나 없이 '통장'과 '밥'으로 전해진 남자의 마음. 그러나 저는 그때 남편의 숯검정 눈썹에 반해 있었기에 그 나름 낭만적인 프러포즈라 생각했답니다. 생각할 것도 없이 '예스'라고 대답했죠.

그런 남편과 십년 넘게 살면서 저는 참 놀랄 일이 많았습니다. 같이 마트를 가면 남편은 무엇 하나 카트에 골라 담는 일이 없기에 저 역시 자꾸 손이 오그라들죠. 물건을 고를 때도, 무조건 최저가품! 그뿐만이 아닙니다. 신혼 초 제가 나름 신경 써서 남편의 옷 몇 벌을 산 적이 있습니다. 결혼하고 패션이 좀 업그레이드됐다는 말을 듣게 하고 싶은 아내의 마음이었죠. 하지만 남편은 그 옷을 싹 다 환불받아 왔습니다. 마음에 안 들어서가 아니라 입던 옷 놔두고 새 옷 입을 수 없다고요. 아직 신혼이라 아무 말 못했습니다만, 속으로는 무척이나 서운했답니다. 남편을 내 남자로 만들어 내보이고 싶은 아내의 마음 같은 건 안중에도 없나 싶어서요.

하지만 저는 그런 일로 불만을 품어선 안 되는 줄 압니다. 혼자 잘 살자고 그러는 건 아닐 테니까요. 하지만 딱 한 가지, 남편이 꼭 고쳐주었으면 하는 점이 있습니다. 우리 둘은 긴축 일변도여도 좋으니 양가 부모님과 아이들에게는 제발 좀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겁니다. 매년 5월이면 저희 부부는 이 문제로 날이 섭니다. 어린이날에 아이들에게 만원짜리 한 장씩 주며 저축해두라고 말하는 남편과 오늘 하루만큼은 저희 세상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아내. 어버이날 봉투엔 십만원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남편과 그래도 우리가 명색이 맞벌인데, 아직도 정말 그 정도 형편밖에 안 된다 생각하느냐고 따지는 아내.

신혼 때는 남편이 어려워 하자는 대로 따랐습니다. 명절에도, 생신에도 무조건 십만원인 봉투가 부끄러웠지만 아무 말 못했죠. 그러다 3년 차쯤 들어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이러다 별명이 십만원 되겠다, 마음은 몇 배로 올려 드리고 싶지만, 일단 아쉬운 대로 두 배로라도 올리자고요. 그랬더니 남편이 뭐랬는지 아세요. 장인·장모님은 올려 드려. 우리 부모님은 앞으로도 십만원이야.

남편이 그렇게 편을 갈라 말하는 근거는 이랬습니다. 저는 막내딸이라 친정 부모님에 대해 책임이 적지만, 자신은 맏아들이라는 것. 그래서 평소 본가에 생활비도 보태 드리고 있고 앞으로 부모님 병원비 같은 것도 본인이 큰 몫을 책임져야 하니 어버이날까지 두둑하게 챙겨 드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며 저는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남편의 생각은 늘 그랬습니다. 부모님에게든 자식에게든 나중엔 내가 다 책임져줘야 하기 때문에 지금은 돈을 쓸 수 없다.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그런 성실한 마음가짐 때문에 당장 인심을 잃고 있으니 안타깝지요. 저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뜻밖의 선물 사오시고, 몰래 용돈 쥐여주실 때 세상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는데, 우리 아이들은 그런 추억을 모릅니다. '아빠 빼고 우리끼리라야 재미있다'는 소리까지 곧잘 합니다. 부모님도 서운한 내색을 감추지 못하실 때가 잦지요. 꼭 액수가 적어서라기보다 남편의 태도에서 각종 기념일을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 팍팍 느껴지니까요. 어머님을 보면 솔직히 제 미래를 보는 것 같아 겁도 납니다. 자식에게 경제적으로 부담 주지 않을 생각이지만, 제 아들이 아빠를 닮아 너무 계산적으로 나오면 슬퍼질 것 같으니까요.

결국 저는 무슨 날만 되면 제 비상금을 털게 됩니다. 친정에는 애당초 제가 손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봉투를 만들어 드린 지 오래고, 시부모님께도 남편 몰래 봉투를 따로 드리죠. 부엌에서 어머님께 봉투를 내밀면 어머님은 사양 한 번 하지 않으시고 얼른 받아 넣으십니다. 아이들 역시 엄마가 따로 선물을 줄 거라 믿고 기다리죠. 시누들에게도, 올케 언니에게도 저 혼자 몰래몰래 갚아 나갑니다. 저는 또 받은 것 이상으로 줘야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이라….

어쩌면 저는 천성이 우리 아버지를 닮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호인과 호구의 경계선을 걷는 물컹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남편은 예전 우리 엄마가 하던 악역을 하는 걸까요? 저는 인심 담당이고, 남편은 진심 담당. 역시 우리는 천생연분, 찰떡궁합인 걸까요?

남편을 흘겨보며 두고두고 우려먹는 원망의 말 한마디를 다시 한번 던져 봅니다.

"당신은 프러포즈도 버스 칸에서 했어. 예스라고 말하고 내리는데 따라 내리지도 않더구먼."

"그렇게 쉽게 대답하고 후딱 내려버릴지 누가 알았나?"

그 말끝에 남편은 기어이 제 아픈 데를 쿡 찌릅니다.

"당신은 하여간 사람이 물러. 뭐 하나 아끼고 잴 줄을 몰라."

※실화를 재구성한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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