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부가 대한항공과 미국 유나이티드항공을 포함한 전 세계 36개 외국 항공사에 "오는 25일까지 대만·홍콩·마카오를 별도 국가인 것처럼 표기해 중국 법을 위반한 사항들을 수정하지 않으면 법에 따라 조치하겠다"고 통보했다. 자신들의 '하나의 중국' 원칙을 해외 항공업계에 강제하겠다는 것이다. 중국의 큰 시장을 무기 삼아 외국 기업을 협박하는 셈이다.
중국 정부의 이 같은 요구는 미국 백악관 성명을 통해 알려졌다. 백악관은 5일(현지 시각) 성명에서 중국 민항관리국이 지난달 25일 업체들에 관련 통지를 한 사실을 알리며 "(이번 조치는) 중국 공산당의 관점을 강제하는 오웰리언(Orwellian·전체주의적) 난센스"라고 비난했다. 백악관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미 기업과 시민들에게 '중국식 정치적 올바름'을 강요하는 중국 공산당에 맞설 것"이라며 "미국은 중국이 미국 항공사들과 시민들을 겁박하는 것을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고 했다.
이에 중국 정부는 6일 겅솽 외교부 대변인 명의의 성명을 내고 "미국이 뭐라고 말하든 지구상에 중국은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며 "중국에서 활동하는 외국 기업들은 중국의 주권과 영토, 중국인들의 민족 정서를 존중하고 중국의 법률을 준수하라"고 맞받아쳤다.
중국 정부가 막대한 자본과 광대한 시장을 무기로 해외 기업에 자국(自國)의 논리를 강요한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올해 들어서만도 중국에 진출한 미국·스페인·일본·독일 기업들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중국 당국의 압박과 네티즌들의 불매 위협에 밀려 사과를 하는 일들이 줄을 이었다.
중국에서 호텔 300여곳을 운영 중인 미국 매리엇호텔은 지난 1월 VIP 회원 대상 설문 때 거주 지역 항목에 대만·홍콩·마카오를 따로 표기했다가 중국 당국에 의해 호텔 중문(中文) 홈페이지를 1주일간 차단당하고 불매운동 위협에도 시달렸다. 호텔 측은 이에 굴복해 "중국의 주권과 영토를 존중하며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킨 행위에 대해 깊이 사과한다"고 발표했다. 스페인의 의류 업체 자라도 중문판 홈페이지에 대만을 국가로 분류했다가 내용을 수정하고 공개 사과했다.
일본의 생활용품 체인 무인양품은 '2017년 추동(秋冬) 가구' 카탈로그에 그려진 지도 때문에 곤욕을 겪었다. 중·일이 영유권 분쟁 중인 센카쿠 열도에 대해 중국명인 댜오위다오가 빠져 있다며 중국 당국이 이 지도를 폐기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지난 4월에는 한국 제주항공이 서울 한 대학 교내에 게시한 홍보 포스터에서 중국 오성홍기와 대만 청천백일기를 나란히 그렸다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중국 CCTV 등으로부터 뭇매를 맞았다.
기업 하나하나를 길들이던 중국 당국은 이번에 36개 항공사를 무더기로 도마에 올려놓았다. 민항관리국은 특히 지난달 25일 통보를 하면서 "한 달 안에 조치하지 않으면 '민간항공산업 신용관리시험법'을 발동해 대응 조치에 나서겠다"고 위협했다. 중국의 압박에 아시아나항공은 항공권 예매 코너에서 기존 동남아로 분류했던 대만 타이베이를 '중국 대륙 및 홍콩 마카오 대만' 카테고리로 옮겼다. 대한항공과 제주항공도 수정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 항공 업체 관계자는 "중국 취항 노선이 많은 한국 항공사의 부담이 더 클 수밖에 없다"며 "시한을 못 지키면 어떤 불이익을 받게 되느냐는 문의에 중국 정부는 답변도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업체 관계자는 "중국 요구대로 하려면 상당한 비용과 시간이 든다"며 "중국의 요구에 바로 굴복하면 앞으로도 유사한 사례가 더 생길 수 있다는 것도 고민"이라고 말했다. 미국 유나이티드항공은 7일 현재 대만(Taiwan)과 홍콩을 모두 별도로 표기하고 있고 델타항공도 대만을 별도 국가로 표기하고 있다.
'미국 민주주의를 위한 기금'은 막대한 시장과 경제력을 무기로 해외 기업을 위협하는 중국의 행태를 '소프트 파워'에 대비한 '샤프(sharp·날카로운) 파워'라고 정의했다. 중국이 자국 내에서 검열과 여론 조작을 일삼는 행태를 국제사회에도 공격적으로 표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백악관이 이번에 "정치적 입장 강요를 자유 진영에 수출하려는 중국의 노력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