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와 억압이 놀이로… 예술에 녹아든 CCTV

조선일보
  • 변희원 기자
    입력 2018.05.07 03:00

    멕시코 아티스트 로자노 헤머, 아모레미술관 개관전에서 첫 선
    지문·얼굴 인식을 미술과 결합… 관객이 참여해 즐기는 작품 선봬

    라파엘 로자노 헤머(51)는 아내가 쌍둥이를 임신했을 때 두 대의 초음파 기기로 두 아이 심장박동을 동시에 들었다. 아들과 딸의 박동은 리듬도 음색도 달랐다. 전혀 딴판인 두 곡의 노래가 합쳐져 화음을 내는 듯했다. '배 속에 같이 있는 쌍둥이도 다른데 하물며 인간은 저마다 얼마나 다른가. 이들이 함께 있는 건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로자노 헤머는 240개 백열전구로 인간의 심장박동을 표현하는 '펄스 룸(Pulse Room)'이란 작품을 만들었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 개관전으로 열리는 로자노 헤머의 '디시전 포레스트(Decision Forest)'는 미술 전시라기보다 엑스포나 놀이동산에 더 가깝다. 멕시코 출신인 그는 기술과 미술을 결합해 관객을 참여시키는 작품을 꾸준히 내놨다. 가디언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전자 예술가(electronic artist)"라 칭했다. 한국에서 처음 열리는 개인전에 신작 5점을 포함해 26점을 선보인다.

    관람자의 모습을 안면 인식 카메라가 찍어 모니터로 보여주는 ‘바이래터럴 타임 슬라이서’. 그 앞에 로자노 헤머가 서 있다. 새로운 관람객의 사진이 찍히면 이전 관람객 사진은 반으로 갈라지면서 양옆으로 밀린다. 새로운(젊은) 것이 오래된(늙은) 것을 밀어내는 셈이다.
    관람자의 모습을 안면 인식 카메라가 찍어 모니터로 보여주는 ‘바이래터럴 타임 슬라이서’. 그 앞에 로자노 헤머가 서 있다. 새로운 관람객의 사진이 찍히면 이전 관람객 사진은 반으로 갈라지면서 양옆으로 밀린다. 새로운(젊은) 것이 오래된(늙은) 것을 밀어내는 셈이다. /김지호 기자

    2007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멕시코관 대표작가로 선정됐을 때도 '펄스 룸'을 선보였다. '맥박'이란 제목처럼 여러모로 '두근거리는' 작품이다. 관람객이 심장박동을 기록하는 막대기를 두 손에 쥐면 전구 불빛이 그 박동에 따라 반짝반짝 빛난다. 스피커에선 맥박 소리도 함께 나온다. 30초 후, 앞서 다녀간 관람객 239명의 맥박 소리가 한꺼번에 울려 퍼지고 전구들도 따라서 깜빡인다. 춤추기 가장 좋은 박자는 인간의 심장박동이라더니, 미러볼보다 현란하게 명멸하는 240개 전구가 어우러지자 축제라도 한판 벌어질 기세다. 작가는 부모가 멕시코에서 운영하던 나이트클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로자노 헤머는 화학을 전공했다. 함께 어울려 다니던 친구는 안무가, 음악가, 시인 등 예술학도였다. 이들과 공연, 전시를 기획하면서 전공과는 멀어졌다. 스스로 "너드"(기술에 환장한 괴짜)라 일컫는 그는 첨단기술을 사용한 작품을 만들었다. 1992년 나온 그의 첫 작품은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라 눈동자가 움직이는 커다란 눈이었다. 이번 전시에도 나왔다. "기술은 세계화의 언어이자 우리의 현재입니다. 기술에 영향을 안 받는 현대인이 있을까요? 우리가 사는 세계를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건 없지요."

    로자노 헤머가 동원한 기술은 '감시'나 '보안'에 쓰이는 것들이다. 관람자들은 자신의 지문, 목소리, 심장박동, 심지어 얼굴까지 작품에 내놔야 한다. 기술에 조종 당하면서도 관람객은 즐거워한다. 로자노 헤머는 "CCTV와 지문 인식 같은 기술이 나쁘다고 비판하는 건 아니다"며 "인간에게 공포를 주는 기술을 놀이처럼 즐겨보자는 것"이라고 했다.

    "불빛을 볼 때면 즐거움과 두려움이 동시에 떠올라요. 미러볼에 반사된 조명 아래서 즐겁게 노는 사람들과 멕시코와 미국 국경 사이에서 감시 조명을 피해 장벽을 넘으려는 사람들을 모두 알기 때문이죠. 예술은 세상과 죽음에서 오는 공포에 저항하면서 동시에 이를 즐기는 겁니다. 영어에서도 'revel'(즐기다)과 'rebel'(저항하다)은 한 끗 차이 아닌가요!" 8월 26일까지. (02)6040-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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