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라프와 오텔로는 내 음악 인생 지탱해주는 빛과 그림자"

조선일보
  • 김경은 기자
    입력 2018.05.03 03:01

    '투란도트' 주연만 80번 한 테너… '정상의 칼라프'로 꼽히는 박지응

    "아직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으니 맞혀 보시오. 내일 날이 밝을 때까지 나의 이름 말할 수 있다면, 기꺼이 죽음을 맞겠소."

    지난 2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서울시오페라단 오페라 '투란도트'(연출 장수동)에서 주인공 칼라프로 분한 테너 박지응(루디 박·41)은 그야말로 기품 있는 왕자였다. 소리를 우악스럽게 내지르지 않고도, 바짝 날 선 투란도트를 품어 안으며 공연장을 감쌌다.

    데뷔 10년 차 '루디 박'은 유럽 주요 오페라극장에서 '정상의 칼라프'로 손꼽힌다. 지금까지 '투란도트'를 80회 소화했고, 유서 깊은 '토레 델 라고 푸치니 페스티벌'에도 네 차례 섰다.

    박지응은 “고루할 만큼 깍듯이 지킨 한국식 예의범절도 성공 비결”이라고 했다. “이탈리아어 존댓말을 꼬박꼬박 쓰고, 두 손 모아 인사하니 ‘루디는 예의 바른 청년’이라며 좋아하더군요.”
    박지응은 “고루할 만큼 깍듯이 지킨 한국식 예의범절도 성공 비결”이라고 했다. “이탈리아어 존댓말을 꼬박꼬박 쓰고, 두 손 모아 인사하니 ‘루디는 예의 바른 청년’이라며 좋아하더군요.” /조인원 기자

    화장을 지운 박지응은 188㎝ 거구에 어울리지 않게 눈웃음이 깜찍했다. "고교 1학년 때 '떠나가는 배'를 불렀어요. 음악선생님 눈빛이 바뀌었죠." 중앙대 성악과에 진학했다. 고음(高音)이 나지 않았다. '바리톤인가?' 했는데, 저음도 안 나왔다. 목구멍을 들여다본 이비인후과 의사가 말했다. "자넨 테너야."

    선배들 틈에 끼어 합창하고, 단역이라도 부지런히 무대에 섰다. 국립오페라단 오페라아카데미에서 만난 테너 만리오 로키의 원리 원칙을 강조하는 가르침도 컸다. "그때 깨달았죠. 성악은 과학이란 걸." 2002년 유학 간 로마 산타체칠리아 국립음악원에서 마침내 목이 트였다.

    2003년 아네모스 콩쿠르를 시작으로 대회마다 우승을 거뒀다. 득의만만했다. 2007년 루치아노 네로니 콩쿠르에선 특별상에 그쳤다. '비리'라고 생각했다. 전설의 성악가 마리오 델 모나코의 사망 25주년을 기리는 무대에 니콜라 마르티누치 등 정상급 테너 10인과 함께 섰다. 2009년 오페라 '투란도트' 콩쿠르에서 칼라프 역으로 1위를 하면서 베로나 필하모니코 오페라극장의 '투란도트'로 데뷔했다. 첫 무대로 잭팟을 터뜨렸다. '이탈리아인보다 정확한 이탈리아어 발음' '오스카상에 견줄 만한 연기력' 등 호평이 쏟아졌다.

    칼라프는 오늘의 그를 있게 한 배역이다. 하지만 그는 "칼라프로 인해 짓눌리다 못해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유명해질수록 작아지는 걸 느껴요. 매번 성공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이 크고요. 백 번 잘했는데 백한 번째에 무너져 망신 당하지 않을까 하는…."

    실제로 가사를 잊어 야유가 쏟아지는 악몽을 꾼다. 인종차별도 힘들다. 그래서 도전하고 싶은 작품이 셰익스피어를 바탕으로 쓴 베르디 오페라 '오텔로'다. "칼라프는 이방인으로 찾아와 투란도트를 차지하는 쾌감을 누립니다. 반면 오텔로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숨죽여야 했지요. 희비극이 엇갈리는 두 배역이 제겐 삶을 지탱해주는 빛과 그림자입니다. 제 삶에서 사랑하고 박수 받는 건 칼라프, 고난을 이겨내고 무대에 서는 건 오텔로."

    수더분하게 생겼지만 치밀한 구석이 있다. 최상의 목을 유지하기 위해 의사와 머리를 맞대고 아연, 비타민, 철분, 마그네슘을 하루에 얼마나 먹으면 좋을지 수년간 분석했다. 결론은 물. 날마다 2L씩 마신다. 2016년 푸치니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투란도트' 영상물이 곧 출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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